해남읍에는 간혹 TV 프로그램 동물농장에서나 나올법한 진귀한 장면이 펼쳐진다. 개 2~3마리가 전동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한 남자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모습이다. 읍에서 이런 풍경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건 지난해 황만석(56)씨가 유기견들을 키우게 되면서부터다.황 씨는 다리의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붙지 못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다. 구교리 ‘들 가운데 집’네 4남1녀 중 셋째아들이었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순탄치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의 뼈가 뒤틀리게 태어났던 것이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몸이 성한 형제들을 챙
‘질서’라는 글자가 박힌 빨간 모자를 꾹 눌러 쓴 정영식(해남읍, 70) 할아버지. 차량 통행량이 많은 터미널 근처에서 불법 주차 차량과 씨름하고 있는 정 할아버지는 노인 일자리 사업 중 하나인 주차관리 요원이다.정 할아버지는 2남 3녀 오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수성리에서 살았는데, 정 할아버지에게는 정남조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도 ‘남조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두 개의 이름으로 살고 있단다.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광주은행 사거리에 있던 큰 정미소에서 쌀과 보리 등 각종 잡곡을 파는 조그만 싸전을 하셨다. 머리
햅쌀이 나오고 있는 요즘 정미소는 벼 찧는 소리로 시끌시끌하다. 요란스레 움직이는 기계들 사이로 깨끗이 정미된 쌀알들이 흩어져 나오고, 포대에 옮겨 담은 쌀은 제 주인을 만나기 위해 차곡차곡 쌓여 간다.박종서(69)대표는 정미소의 분주한 풍경과 함께한 지 40여년이 넘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시작했던 방앗간을 평생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단다.삼산 금산리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 씨. 주로 농사만 짓고 살았던 당시의 해남은 대농은 잘 살았지만 소농은 어렵게 살아 빈부격차가 크던 시절이었다. 박 씨의 부모님도 농사를
20년간 큼직한 버스 한 대를 제 몸처럼 움직여 해남 곳곳을 누비고 있는 고상석(62)씨. 운전대를 잡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모습들을 지켜본 세월, 사람뿐만 아니라 숱한 이야기들까지 묵묵히 함께 실어 날랐다.그의 고향은 진도 지산면이다. 3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장남이면 떠받들어주던 시절이었고, 우선권이 있는 만큼 부담감도 컸다.6남매를 키우기 위해 부모님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셨다. 하지만 다리조차 놓이지 않았던 진도는 산업시설이 거의 없었고, 주민들 모두 생활이 어려운 낙후된 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시장에 나와 상인들을 위해 셔터문을 여닫는 사람이 있다. 바로 매일시장 관리인 정현식(75)씨다.정 할아버지는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구교리 산등성이 근처의 집에서 자랐다. 연세가 많은 부모님이 형제를 띄엄띄엄 낳아 나이차이 많은 형제들과 아웅다웅하며 지냈단다.정 할아버지가 5살이던 때 일제의 손에서 벗어나 해방이 됐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는 외삼촌이 리어카를 끌고 정 할아버지를 태우고 가는데, 미군들이 정 할아버지를 보고 품에 보듬던 기억이란다.해남서초에 입학한 후 6.25가 터지면서 인민
해남읍 광주은행 사거리에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을 묵묵히 지켜오는 할아버지가 있다. 구두수선 30여년 경력의 이흥조(70)씨다.지난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갓난아기던 6개월 무렵 부모님이 길호리로 이사하면서 해남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너무 어릴적이라 진해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어 해남을 고향으로 여긴단다.할아버지의 부모님은 진해에 있었을 때 고모가 배 두 척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잘 살았지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말했단다. 사기꾼을 찾기 위해 길호리로 왔다가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