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시장에 나와 상인들을 위해 셔터문을 여닫는 사람이 있다. 바로 매일시장 관리인 정현식(75)씨다.

정 할아버지는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구교리 산등성이 근처의 집에서 자랐다. 연세가 많은 부모님이 형제를 띄엄띄엄 낳아 나이차이 많은 형제들과 아웅다웅하며 지냈단다.

정 할아버지가 5살이던 때 일제의 손에서 벗어나 해방이 됐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는 외삼촌이 리어카를 끌고 정 할아버지를 태우고 가는데, 미군들이 정 할아버지를 보고 품에 보듬던 기억이란다.

해남서초에 입학한 후 6.25가 터지면서 인민군과 이야기도 나눠봤다는 정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6.25하면 잊을 수 없는 가슴아픈 기억이 있다. 집안의 든든한 자랑거리였던 맏형에 관해서다.

목수이셨던 아버지는 엄했지만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분이셨고, 그 시절 많은 집이 그러했듯 장남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정 할아버지가 10살 때 맏형은 광주 20연대에서 상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은 늘 어린 동생을 보살펴줬다. 그런 형이 휴가를 얻어 집에 왔을 때 정 할아버지는 형이 반가워 방방 뛸 정도였다.

맏형과 함께 산골짜기 집으로 올라가던 중 멧돼지를 만났는데, 당시 태극기를 단 총을 메고 왔었던 맏형은 ‘엎드려!’라는 말을 남기고 멋지게 멧돼지를 잡기도 했단다.

맏형이 부대에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광주 20연대는 한강에서 몰살당했다는 기별이 왔고, 그렇게 집안의 기둥이던 맏형은 하늘의 별이 됐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큰아들을 양자로 올려놓기만 한 큰집의 큰어머니가 큰아들 죽음에 대한 보상금과 연금을 들고 잠적하면서 마음에 병이 생겼다. 큰집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작은집의 아이를 데려다 양자로 올리는 일이 많았던 때라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정 할아버지는 형을 잃은 슬픔을 딛고 해남중학교에 진학했다.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친구도 많았지만, 워낙 학생이 많았던 때라 입학경쟁도 치열했다.

빡빡머리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과설극장에 취직했다. 해남극장이 생긴 자리였다. 영화를 선전하고 영사기를 돌려 영화를 상영하는 일을 맡았고, 각 면으로 찾아가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10리 밖에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만큼 놀 거리도, 볼 거리도 없던 시절이었다.

2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군대 입대하고 난 후 큰아들을 잃은 충격과 집안사람의 배신에 시름시름 앓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컸고, 90살이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그 다짐을 지켰다.

제대한 후 다시 극장에 돌아와 일을 하다 여수로 떠났다. 사업 운이 트였는지 운수사업을 하며 택시 세 대를 갖고 있었고, 부속상회와 차 매매도 했었다. 사업을 하며 아내를 만나 연애결혼도 했고, 3남매를 낳았다. 그렇게 여수에 정착할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업이 실패하면서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고, 가족들과 함께 해남으로 돌아왔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공사판 막노동을 하며 다니다 매일시장 관리인을 맡게 됐다. 술을 마시다 매일시장 상인들과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이 있어야 질서를 잡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일을 권유받았다는 재미난 비화가 있단다.

매일시장 관리인, 노년의 즐거움
말뿐인 시장 활성화정책 안타까워

당시 매일시장 근방은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흥교다리쪽에는 과일장수들이 즐비했고, 주차장 자리에도 노점상들로 북적였다. 시장은 규모가 215평밖에 되지 않아 시장 내부로 들어오지 못한 노점상들이 많았고, 단속하며 노점상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이후 가건물을 만들어 그 노점상들도 자리를 얻었지만 다 고인이 되시고 지금은 딸이나 며느리가 하고 있단다.

매일 시장에 가장 먼저 나와 셔터문을 올리고, 가장 늦게 남아 셔터문을 닫는 정 할아버지. 매일시장 주변의 환경미화도 할아버지의 몫이다. 쓰레기 상습투기지역의 쓰레기를 수시로 정리하지만 워낙 양이 많아 혼자서 다 처리하기에는 엄두도 못 낸다. 교통량이 많이 오가는 차에 길이 막힐 때면 나서서 정리도 해줘야 한단다.

정 할아버지는 정해진 월급이 없다. 시장 상인들에게 1만원씩 걷은 돈을 시장상인협회에 33만원을 주고 시장내부 보수나 필요한 물품 구입, 기타 상황 등에 쓰고 난 후 남는 돈이 할아버지의 월급이어서 일정하지가 않단다. 그래도 올해부터 노인연금이 20만원 나와 보탬이 된다고.

월급은 적지만 나이가 들수록 노인들을 쓰는 곳은 많지 않아 관리인으로서 만족한단다. 인생의 말년을 매일 시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면 심심해서 못 버틸거라며 임무를 다할 생각이라고.

“노인들이 집에만 들어가 있으면 안 아프던 사람도 그때부터 환자가 돼. 그러니 시장으로 나오지. 돈도 돈이지만 올해 막내딸도 여의었고 이제 큰 욕심 없어. 여러 사람 만나면서 웃고 떠들며 내 일을 한다는 게 요즘 세상에서 복이지. 특히나 나 같은 노인한테 이런 일이 어디 흔하것어?”

정 할아버지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는 것이다. 매번 시장을 활성화시키겠다는 말은 나왔지만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어 아쉬움이 크다. 다른 지역은 시장을 살리기 위해 차별화된 시장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는데 어째 해남은 잠잠하기만 하단다.

몸이 허락할 때까지 시장 관리인의 삶을 살고 싶다는 정 할아버지. 추석과 설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시장에 나와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즐겁다며 시장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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