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 광주은행 사거리에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을 묵묵히 지켜오는 할아버지가 있다. 구두수선 30여년 경력의 이흥조(70)씨다.

지난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갓난아기던 6개월 무렵 부모님이 길호리로 이사하면서 해남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너무 어릴적이라 진해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어 해남을 고향으로 여긴단다.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진해에 있었을 때 고모가 배 두 척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잘 살았지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말했단다. 사기꾼을 찾기 위해 길호리로 왔다가 그대로 정착하게 됐다고.

이 할아버지는 11살이 되던 해 길호리에서 읍내로 이사를 왔다.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호적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진해까지 가서 호적을 찾은 후 12살이 되던 해 겨우겨우 1학년으로 입학했다.

입학을 늦게 했다보니 18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선생님께서 중학교를 보내주겠다고 학교에 다니라고 했지만 돈이 없어서 진학할 수 없었다. 도시락을 싸갈 형편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디 우찌 학교를 댕기겠나. 내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어서 장사를 해야 혔어. 내가 2남 4녀에 둘짼데 큰아들이거든. 장사 진짜 별거 다 했제. 안해본 것이 읍써”

할아버지는 여름에는 하드 장사, 겨울에는 김밥이며 껌, 달걀 등을 팔았다. 묵직한 상자를 들쳐메고 여관이나 다방 등 골목골목을 누비며 장사를 했다. 지금도 ‘찹쌀~떠억~’하는 소리를 맛깔나게 낼 정도로 매일이 장사의 연속이었다.

쌀을 살 돈조차 없어서 장사로 돈을 벌면 밀가루 한 포대를 샀다. 밀가루로 풀을 쑤듯 멀건 죽을 쒀 나눠먹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줄줄이 있는 동생들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장사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26살이 되던 해에는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시작했다곤 하지만 구두 닦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잡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배웠단다. 구두 한 켤레 닦으면 3환을 받던 때였다. 밤낮으로 두들겨 맞았고 돈도 제대로 못 받았다.

그래도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몇 년을 꾹 참고 버텼다. 구두수선하는 사람이 오기라도 하면 주위를 맴돌며 눈으로 기술을 익혔다.

서럽게 배워가며 31살에 독립해 구두수선을 시작했다. 독립했을 때 5년 열애 후 결혼한 아내와 3년 만에 첫째딸을 낳아 묵직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누르던 해였다.

시장 근처에서 버려진 나무판을 주워 궤짝과 구두통을 만들어 메고 다녔다. ‘구두 닦어~’라는 소리를 쩌렁쩌렁하게 내며 손님을 찾아 헤맸다. 그 때는 해남에 다방이 많았는데,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임자라고 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구두닦는 사람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여관과 다방, 군청, 농협 들을 돌았다. 아침은 죽을 먹고 나왔지만 점심은 챙겨먹기 힘들어 건너뛰었다. 아내와 2남 2녀의 자녀들, 나이 드신 어머니의 생계가 그의 구두통에 달려 있었다.

그러다 지금의 자리에 천막을 치고 구두수선을 시작했다. 천막이 나무판자가 되고, 플라스틱이 되고, 컨테이너 박스로 변했다. 한 평 남짓한 그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 공간에는 사용한 지 10여년이 훌쩍 넘은 낡은 나무틀과 30여가지의 공구들로 가득하다. 구두 밑창 바꾸기, 뜯어진 부분 꼬메기, 운동화 수선 등 다양한 신발을 고치다보니 공구들도 다양하단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손님은 줄었다. 10년 전과 비교해도 반토막일 정도다. 해남에 사람이 줄어든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많던 구두닦이들과 수선공은 어느 샌가 사라져 몇 남지 않았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중년 남성들로 손님층이 넓지도 않단다.

그래도 단골손님들이 아직까지 찾아준다. 아침 9시 30분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일요일을 빼고 매일 자리를 지키지만 많이 벌면 6만원, 못 벌면 3만원이다. 수선 재료비를 빼고 나면 크게 남지도 않아 아직도 아내는 품을 팔러 다닌다.

그는 이곳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말한다. 하루 내내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감옥같이 느껴진단다. 오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지켜보거나 들러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한 때다.

그래도 나름 기술직이기 때문에 건강이 허락되는 한 따로 정년이 없다는 게 그의 큰 위안이다. 동년배 노인들을 보면 일자리가 없어 노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정도면 할 만 하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10년은 더 버틸 생각이란다.

“요즘 자식들은 부모 안 모시잖여. 나중에 요양원 들어가려면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된디 그게 안 되서 걱정이제. 아직 살아계신 우리 어머니나 아내 노후준비도 해야 되는데 자식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 그란디 모은 돈은 없은께 갑갑혀”

한 평의 구둣방. 16인치 낡은 TV, 오래된 공구들, 손님들을 위한 헤진 의자와 구멍 뚫린 작업복. 말없이 그를 표현하는 이 작은 공간에서 오늘도 구두를 닦는다.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