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이 나오고 있는 요즘 정미소는 벼 찧는 소리로 시끌시끌하다. 요란스레 움직이는 기계들 사이로 깨끗이 정미된 쌀알들이 흩어져 나오고, 포대에 옮겨 담은 쌀은 제 주인을 만나기 위해 차곡차곡 쌓여 간다.

박종서(69)대표는 정미소의 분주한 풍경과 함께한 지 40여년이 넘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시작했던 방앗간을 평생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단다.

삼산 금산리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 씨. 주로 농사만 짓고 살았던 당시의 해남은 대농은 잘 살았지만 소농은 어렵게 살아 빈부격차가 크던 시절이었다. 박 씨의 부모님도 농사를 지었지만 형편이 좋지 못했다. 그래도 장남이 잘 돼야 집안이 산다는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삼산초를 졸업한 후 서울로 보내졌다.

서대문에 위치한 인창중학교에 다녔던 그는 당시 자취했던 왕십리에서 1시간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집안의 기대를 짊어지고 서울에 올라왔던 터라 등교하는 시간마저 아까워 길가의 문판 위 한문을 보며 한문공부를 했을 정도다.

하숙비를 벌기 위해 신문 배달도 했었고, 토요일이면 친구들과 극장에 가 암표장사를 했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보기 위해 불법인 걸 알면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장사를 했단다.

기술직이 돈을 잘 번다는 말에 공고에 입학해 전기관련 기술을 배웠다. 지금도 집안의 전기 설비를 다룰 정도다. 전기기술자였기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천의 34사단에 통신병으로 복무하게 됐다.

맞는 게 당연했던 군생활을 2년 6개월 버티고 제대한 후 전화국에 취직하게 됐다. 첫 월급은 6만원이었다. 당시 병장 월급이 1만 4000원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박봉이었던 셈이다. 전화국에서 3개월가량 일했을까, 박 씨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방앗간을 차리셨던 아버지가 그를 고향으로 불렀다. 함께 정미소를 해보자는 이유였다.

박 씨가 서울에 살았을 때만 하더라도 호남미는 미질을 인정받지 못했다. 가장 상품은 경기미, 그다음은 충청미 등으로 호남미는 가장 하품으로 인식돼 제값을 받지 못했다. 80kg 한 가마에 1만 5000원을 받아 경기미와 1만원가량 차이가 났었단다.

부모님이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호남미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박 씨는 전화국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정미소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정미소의 쌀을 직접 거래 하는 일이었다. 도매상이 있는 용산시장에 좋은 품질의 쌀을 싣고 가도 제대로 보지 않고 호남미라며 무시하고, 값싸게 소매점으로 넘기는 게 분통이 터져서였다.

“어떤 소매점으로 가는지 따라가 봤지. 경동시장이나 청량시장 등으로 가더라고. 그래서 소매점 상인들에게 직접 홍보 했어. 나중엔 미질을 인정받아서 우리 정미소 쌀은 중간상인 장난을 없애고 가격을 더 받을 수 있었지”

정미소 일이 손에 익자 손님들의 요구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80kg씩 판매하던 정미소의 쌀을 일반 손님이 구매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영세민용 소포장 쌀에서 착안해 20kg로 나누어 판매했다. 손님들의 반응이 뜨거워 본격적으로 소포장 판매를 시작했다. 또 지난 1997년부터는 땅끝쌀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택배사업을 시작했고, 땅끝 해남이라는 이미지 확립을 위해 애쓰기도 했단다.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시위자들이 먹을 쌀이 없자 광주며 완도에 쌀을 보내기도 했다. 바쁜 정미소일 때문에 금쪽같은 4남매의 일도 많이 신경써주지 못했다. 그래도 그런 기억들이 지금의 박 씨를 만들었기에 후회는 없다. 다행히 자녀들도 바쁜 부모님을 이해하고 스스로 갈 길을 만들어 간단다.

박 씨는 정미소가 안정되자 점점 해남이라는 지역사회에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에 다양한 활동들을 시작했다.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럿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정미소가 고도리에 있어 마을 일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예비군 고도리 소대장과 고도리 장터 청년회장등을 맡았다. 당시 삼호아파트 자리에서 정미소를 했었는데, 지난 1989년 정미소 앞에서 열리는 우시장에서 경로잔치도 열어 감사패도 받았다.

그의 활동은 1990년대가 되자 더 활발해졌다. 해남읍 방범대를 만들어 남부파출소와 협력하기도 하고, 해남읍 체육발전회를 만들며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렇게 쌓인 활동들은 찬장에 21개의 다양한 표창장들로 남아있다.

“살아보니까, 나 혼자 살아서는 안 되겠더라고. 다 함께 살아야 해. 짧게 보면 나 혼자 사는 게 좋아 보이겠지만 길게 보면 그게 아니야”

박 씨는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건강해져야 한단다. 그가 마라톤과 등산, 자전거 등 각종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다.

그가 50살 무렵, 군청 앞에서부터 해남읍 한 바퀴를 도는 해남군민 달리기에 참여했었는데 읍내 한 바퀴 조차도 돌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약해져 있었다. 술과 담배를 하던 때였다.

이때부터 운동에 관심을 갖고 마라톤과 등산을 시작했다. 술담배를 끊었고 해남뿐만 아니라 장흥, 고창, 광주 등 다양한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해 완주했다. 5년 전부터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꾸준히 타고 있단다.

“건강이 좋지 않고 상황이 어려워도 ‘하면 된다’는 의지를 가져야 해. 내 생각엔 의지라는 게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 삶에도 희망이 되거든. 나이 먹어서 다른 걸 해서 뭐하나 싶은 생각보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지”

박 씨는 군이 해남의 자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인근 지역만 해도 건강과 관련해 다양한 대회와 축제들을 유치하고 있지만 해남은 아직까지 잠잠하다는 게 그 이유다.

“해남은 진정한 웰빙지역이야. 활기찬 해남이라는 두루뭉술한 슬로건보다 이미지를 딱 심어줄 수 있는 게 필요한데 말이지. 힐링 해남이라는 기치를 얼마만큼 풀어낼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산천 모든 것이 깨끗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임을 잘 알렸으면 좋겠어. 이건 머리싸움이야”

해남의 산과 바다를 사랑한다는 박 씨. 앞으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살려 1등 명품 건강도시 해남이 될 때까지 그의 해남사랑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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