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에는 간혹 TV 프로그램 동물농장에서나 나올법한 진귀한 장면이 펼쳐진다. 개 2~3마리가 전동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한 남자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모습이다. 읍에서 이런 풍경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건 지난해 황만석(56)씨가 유기견들을 키우게 되면서부터다.

황 씨는 다리의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붙지 못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다. 구교리 ‘들 가운데 집’네 4남1녀 중 셋째아들이었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순탄치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의 뼈가 뒤틀리게 태어났던 것이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몸이 성한 형제들을 챙기는 것도 벅차했고, 집안이 어려워 병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밥만 포로시 먹였다’고 말할 정도로 방치됐었던 황 씨. 두 다리가 꼬부라진 채 발 끝까지 뒤틀려 누군가의 도움이 없거나 기댈 수 있는 게 없으면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다섯 살 때 간신히 혼자서 벽을 잡고 일어섰던 기억이 아직도 남는단다.

그래도 집에 찾아오시던 할아버지가 황 씨를 업고 산책을 나가거나 다리를 주물러주셨다. 유일하게 받았던 따뜻한 관심이었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도 황 씨가 7살이 되던 해 봄에 돌아가셨고, 그는 다시 외톨이가 됐다.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복지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때였다. 장애인 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일반 아동보다 더 많은 학비를 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 결국 가정형편상 학비가 부담돼 학교에 가지 못했다. 둘째형이 알려준 이름 석 자와 아라비안 숫자 1~10, 그리고 구구단 3단이 그가 알던 전부였다.

제대로 걷지 못해 집에서만 생활하던 그는 친구도 없었다. 다들 학교에 가는데다,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걷지 못하니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를 사귈 수 없었던 것이다. 형제들마저 학교에 가고 나면 텅 비어버린 집을 지키는 건 혼자 남은 황 씨였다. TV도 없었던 때라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런 황 씨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9살이 되던 해, 오른쪽 다리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뒤틀렸던 뼈가 어느 정도 원래의 뼈 모습을 되찾게 되면서 힘들게나마 혼자서 걷을 수 있었다. 집 근처 냇가에 내려가 물고기도 잡아보고, 혼자서 뒷산에 오르기도 했다. 집에서 늘 외로웠던 그는 느리게나마 혼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커다란 행복이었다.

16살이 되던 해 황 씨도 사회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다. 동네 주민의 권유로 양복점을 다니게 된 것이다. 농사짓기도 힘든 몸이었기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양복일은 큰 기회였다. 그는 지난 1976년부터 양복점에서 일하기 시작해 1990년대까지 15년간을 일했다. 쌀 한 되에 30원 하던 시절, 첫 월급은 500원이었다.

일 하는 건 고행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몰라 책을 보고 배울 수도 없었고, 옆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어깨 너머로 터득해야 했다.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다리 때문이냐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고, 다리를 밟히는 괴롭힘도 당했다.

그래도 객지로 나간 형제들을 대신해 집에 보탬이 될 수 있었고,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막내 고모가 ‘보리숭어가 효자노릇 하네’라고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할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선천적 다리장애, 외톨이 신세
우연히 만난 유기견이 삶의 낙

하지만 행복도 잠시, 지난 198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년이 지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성치 않은 몸으로 혼자 살게 된 것이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양복점에 꾸준히 다녔지만, 기성복이 대거 쏟아지면서 손님이 줄어들고 결국 그만두게 됐다.

지금 황 씨는 정부의 지원금으로 살고 있다. 영세민 급여비 30여만원과 지체장애 보조금 3만원 가량이다. 뼈가 뒤틀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오래 서있을 수도 없지만, 발이 온전하게 붙어 있어 장애 등급이 높지 않단다.

장애인 복지관도 다니지 않고 혼자 해남읍 이곳 저곳을 누비며 산책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황 씨. 최근에는 아버지 산소 근처에 100여평의 조그마한 밭을 만들어 가꾸는 게 취미다. 밭일이 여간 힘들지만 직접 무언가 일궈나갈 수 있다는 게 행복이란다.

여기에 지난해부터 기르게 된 강아지들이 있어 위안을 얻는다. 지난해 5일 시장 놀이터 공원에 있던 유기견 다섯 마리와 마주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새끼 한 마리가 따라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다섯 마리가 전부 그를 따라다녔다. 쭉 혼자서 사느라 적적했던 마당에 그를 따르는 생명들이 있다는 게 기뻐 키우게 됐다.

황 씨가 외출을 할 때면 멍순이와 똘이, 땅땅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들을 함께 볼 수 있다. 함께 산책하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밖에 나갈 채비를 하면 황 씨보다 먼저 휠체어에 자리를 잡고 있단다. 다섯 마리 중 두 마리는 안타깝게도 두 마리가 차에 치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황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대부분 차도이기 때문이다.

해남에 차가 워낙 많다보니 갓길로 다닐 수 없다. 뒤따라오는 차에게 길을 비켜주고 싶어도 공간이 없어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다. 숨바꼭질을 하듯 주차된 차 사이사이로 비켜주며 길을 나설 수밖에 없다.

보행로로 다니자니 차도보다 문제가 많다. 보행로에 오르는 턱이 높거나 급경사로 인해 인도 진입 자체가 힘든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행로 폭도 좁은데다 고르지 못한 길 상태에 바퀴가 빠지기도 한다. 전봇대, 화분 등의 장애물이 있으면 보행자와 부딪힐 위험도 커진다.

“한 번은 차도로 다니는 게 위험해 인도로 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가는 걸 보지 못한 할아버지 한 분이 뒷걸음질 치다 제 스쿠터와 부딪히게 됐죠. 당장 보행로를 개선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보니 전동휠체어를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차도로 다닐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편이다. 답답해하는 운전자도 있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운전자도 있어서다. 장애인들도 인식을 바꿔 비장애인들에게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스스로 의지를 갖고 어떤 일이든지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수많은 차별을 받고 자랐던 서러운 장애인의 삶이었다. 하지만 세월을 돌아보니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인생이 아닐까 싶단다. 자신을 따르는 작은 생명들을 위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살 거라는 황 씨, 오늘도 행복한 산책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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