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큼직한 버스 한 대를 제 몸처럼 움직여 해남 곳곳을 누비고 있는 고상석(62)씨. 운전대를 잡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모습들을 지켜본 세월, 사람뿐만 아니라 숱한 이야기들까지 묵묵히 함께 실어 날랐다.

그의 고향은 진도 지산면이다. 3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장남이면 떠받들어주던 시절이었고, 우선권이 있는 만큼 부담감도 컸다.

6남매를 키우기 위해 부모님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셨다. 하지만 다리조차 놓이지 않았던 진도는 산업시설이 거의 없었고, 주민들 모두 생활이 어려운 낙후된 지역이었다.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장남인 고 씨가 빨리 취직을 해야만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쑥밥, 보리빵 등을 먹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뒤,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 영등포로 상경했다. 지금이면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17살이지만, 예전에는 고 씨처럼 시골에서 상경해 일자리를 찾는 또래가 많았다. 특히 영등포는 호남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단다.

그렇게 상경한 영등포에서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온갖 공장이 모두 모여 있던 공장지구였기에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고 씨는 식당부터 구두공장, 페인트 공장까지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가 영등포에서 받은 첫 월급은 4만원. 첫 월급도 절반인 2만원은 집에 부쳐 동생들의 학비에 보탰다. 이후에도 꼬박꼬박 월급의 절반을 부쳐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월급이 많진 않았지만 그 때는 먹여만 주면 돈도 안 받고 일하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기에 꾹 참고 일을 다녔다.

고된 일과에 지친 몸을 뉘일 곳은 자취방뿐이었다. 당시 15원~20원 하던 라면으로 대부분의 끼니를 때웠다. 일이 너무 힘들때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또래 친구들과 회포를 풀러 가기도 했다. 막걸리나 소주 한 잔씩 걸치면 전국 팔도의 지방방송이 다 나왔었다.

1년에 한 번 명절이 되면 부모님을 뵈러 진도에 내려갔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야간열차를 12시간 타야 겨우 내려갈 수 있었다. 또 다시 목포에서 배를 타고 3~4시간을 가야 진도에 도착할 수 있었고,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야 비로소 집 마당을 밟을 수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어도 내려갈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8년 동안 영등포에서 지내다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 삼성동에서 학원을 다녔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 시절은 시골에서 1마리에 5~6만원 하는 새끼 돼지 한두 마리씩 기르는 게 흔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애지중지 기른 돼지를 팔아 학원비를 보태주셨다. 돼지 한 마리에 35~40만원 하던 때였다.

보통 면허를 따고 1년 뒤 대형 면허까지 취득했다. 택시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면허를 땄었지만, 막상 입사하려고 보니 차 정비부터 3~4년 배워야 택시를 운전할 수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아가며 정비기술을 배워야만 택시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회사에 취직해 잠시 일하다가 같은 지산면 사람이었던 아내와 선을 보게 됐다. 두 살 아래의 어여쁜 아내였다. 면소재지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진도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결혼한 후 이듬해에 예쁜 큰 딸을 낳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좀 더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진도에서 택시도 운전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했다. 해남교통 버스기사 모집 공고를 보고 시험을 친 것이다.
그렇게 고 씨는 지난 1994년 5월 7일, 해남 군내버스 운전기사가 됐다.

출근 두 달간은 견습기사로 버스 운행 코스를 따라다니며 해남 곳곳의 길을 외웠다. 버스는 정확히 정해진 코스대로만 가야하기 때문에 공책에 코스를 꼼꼼히 써가며 달달 외워야만 했다.

“진도에서 온 사람이라 해남길을 제대로 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걸렸지. 그렇게 힘들게 견습을 마치고 났더니 군내버스 코스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더라고. 하하”

고 씨는 20년 전 첫 운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두 달간 코스를 열심히 외웠지만 행여나 실수하게 될까봐 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정해진 코스를 이탈하게 되면 승무 정지가 되고, 월급이 삭감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한 달을 보내고 고 씨가 손에 쥔 첫 월급은 50여만원. 당시 기본요금이 170원정도 하던 때였다.

버스운전기사로 일하게 되면서 해리의 한 가정집을 사서 이사를 왔다. 4000만원이었던 집을 구매하기 위해 빚까지 졌다. 빚을 갚기 위해 아내도 밭일과 식당일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녀야 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20년이 지난 올해는 한 푼 두 푼 모아 빚을 갚고, 평동리로 이사했다.

그는 출근날이면 새벽 5시 10분까지 회사에 나와 운행을 준비한다. 새벽 6시부터 운행을 시작하면 코스에 따라 저녁 9시까지도 운전을 한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있어 잠깐이나마 피곤을 풀 수 있단다.

지금은 눈을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라는 고 씨. 2일 출근하고 하루 쉬는 식으로 일을 하는데 회사 사정에 따라 며칠씩 연속 출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불규칙한 출근일 때문에 아이들과 꾸준히 시간을 갖기 힘들었다. 그래도 자식들이 버스 운전으로 자신들을 뒷바라지 해온 걸 알고 있어 다행이라고.

“요즘 버스는 20년 전에 비하면 택시 수준이야. 시골에 사람이 팍팍 줄어들어. 빈 차로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을 정도지”

학교와 학원을 가기 위해 군내버스를 이용했던 학생들의 수도 많이 줄었다. 그래도 장날이면 사람들로 붐비는 구간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줄어들었다. 노인들이 몇 명 모여 돈을 모아 택시로 이동해서다. 타는 사람이 없다 보니 회사는 기름값도 못 건질 때가 허다하다.

텅 빈 버스지만 고 씨는 정성을 다해 운행한다. 벌써 정년인 60세를 넘어 퇴직을 해야 했지만, 1년마다 계약을 연장해 다니고 있다. 몸이 허락하는 한 버스기사로서 일하고 싶단다.

“요즘 백세시대라고 해서 오래 살잖아. 환갑잔치 하면 오히려 욕먹는 세상이야. 그러니 지금 퇴직해도 날 받아주는 회사를 찾긴 힘들고, 운이 좋아 이직을 한다 해도 월급이 줄어드는 건 마찬가지지. 20년간 해왔으니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

버스기사로서의 계약 연장은 최대 5년. 65세 이후에는 또 다른 인생을 찾아가야 한다고. 시골인 해남에서는 청년소리를 듣고 살기에 새로운 인생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지만, 고 씨에게는 벌써 중학교에 입학한 손녀를 포함해 3명의 손자가 있단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당당한 버스기사야. 이 일을 그만두게 된 이후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테니 미리 걱정하지 않으려고. 인생은 60살부터라는데, 좀 더 힘을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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