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도착 500미터 지점. 마중 나와라. 오버.”“알았다. 오버.”술 한 잔 걸친 남편의 전화다. 밤 12시를 넘기기 일쑤인 술자리에서 2, 3차의 유혹을 뿌리쳤으니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아빠 마중 가자.”“오케이.”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밖에 나섰는데 오락가락하던 소낙비가 멎었다. 마실 가는 기분으로 몇 걸음 떼었는데 아무래도 하늘이 수상하다.“소낙비 올지 모르니 서둘러 가자.”저만치 담장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기다리는 남편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람. 상봉의 순간 장대같은 비가
요즘 텔레비전 예능의 대세는 아이들이다. 어릴수록 인기가 많다. 이제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출연하는 세상이다. 좀 과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계산되지 않은 아이들의 맑은 말과 행동을 보고 있으면 파안대소하고 만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때가 낀 몸 속 세포들이 새하얗게 세탁이 되는 기분이랄까.제법 큰 우리 집 두 녀석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말대꾸에 못들은 척, 눈 치뜨기로 엄마와 맞서지만 녀석들에게도 입만 열면 시(詩)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녀석들에게 상처를 받은 엄마는 생채기를 어루만지며 그 시절 녀석들이 했던
지금껏 인연 맺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가장 큰 축복의 인연은 누굴까? 머뭇거림 없이 아버지를 꼽는다. 내가 관여한 선택은 아니지만 그 분이 내 아버지여서 참으로 행복했노라 말할 수 있다.“제사상에 웬 양념치킨이야?”남편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아버지가 가장 맛나게 드신 음식이라서.”아버지 떠나신지 1년. 나는 제사상에 예법에는 없는 치킨을 올리고 싶었다. “우리 막내가 사다준 요것이 나는 젤로 맛나다.”하시며 달게 드시던 아버지. 3년 전 엄마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되시기까지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엄마
저녁 먹고 녹차까지 마시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는 주말 밤. 4가족이 함께 저녁밥을 먹고 밤 시간을 보내는 건 주말만 가능하다. “아빠, 화투 한 판 어때용?”“내가 벌써 다 준비 했지롱!”화투와 깔판이 가지런히 깔린 방에 모두 모였다. 주말마다 함께하는 여가활동이다.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하고 바닥에 8장 깔고, 각자 5장씩 챙겼다. 복잡한 규칙의 화투놀이는 어려워 민화투를 녀석들에게 가르쳐준 터이다.“나는 껍질만 들었어!”푸념에“나는 언덕 광(보름달 뜬 8번 광을 녀석들은 그렇게 부른다. 작명 솜씨 한 번 끝내준다) 들었는
감꽃을 주워 먹고, 까마중을 훑어먹던 어린 날이 생각난다. 들로 산으로 들쑤시고 다니며 먹을거리를 찾아 헤맸던 어린 날. 주린 배가 늘 헛헛했던 그 때. 40년 전의 까마득한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요즘이다. 텃밭에 가서 풀을 뽑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산딸기. 빨갛게 익은 모양이 하도 탐스러워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가시에 찔려가며 한 손 가득 딴다. “우리 아들 산딸기 우유 만들어주자.”남편은 신이 나서 앞장선다. “한 개 먹으면 안 돼?”“당연히 안 되지.”빤한 대답을 알면서 남편 마음을 떠본다. 나 역시 먹성 좋은 우리
“이 사람과 잘 통하네! 맞는 게 많아. 결혼해도 될 것 같아. 그러나 결혼해 살아보면 맞는 건 몇 가지 안 되고 다른 것 투성이다. 잘 맞는 게 다섯 가지라면 잘 맞지 않는 것은 오백 가지도 넘는다. 결혼이란 원래 그런 거다. 세상에 나와 잘 맞는 사람은 나 말고 없다. 달라서 갈등이 생기고 헤어지고 미워하는 게 아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옳다 고집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옳으면 상대는 틀린 것이 되니 거기서 틈이 생기는 것이다.”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수도 없이 나오는 이야기다. 나도 이 법문의 내용을 이
배달된 선거 공보물이 한 보따리다. 도지사, 군수 그리고 도와 군의원 거기에 교육감까지 여러 사람을 뽑아야 한다.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는데 환이가 곁에 와 다짜고짜 묻는다.“엄마, 누구 찍을 거예요?”“글쎄.......”그때까지 솔직히 누구를 찍겠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군가 찍기는 찍어야겠지.”어설픈 대답에 환이가 발끈한다.“4학년 사회 시간에 선거는 꼭 해야 한다고 배웠어요.”“찍기는 할 건데....... 솔직히 찍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래.”어느 결에 인이까지 곁에 와 이야기를 거든다. “왜요? 공약을 따져보고 찍으세
사과를 한 보따리 사둔 게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사과잼을 만들 요량이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시간만 보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당신 아들이 요구르트 먹을 때 잼 넣어 먹는 거 알죠? 빵에 잼 발라먹는 건 얼마나 좋아한다고요!”아이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남편의 마음을 아는지라 환이를 살짝 팔기로 했다.“사과잼 만들어달라고?”뚱한 목소리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은 아니다.“도와줘서 고마워!”시작도 안 했는데 말 인심부터 썼다. 남편은 녹즙기를 가져다 조립하더니 사과를 열심히 깎았다.조금 있으려니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을 꼽으라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맞다. 원하지 않는 이상 시험볼 일은 없다. 애오라지 시험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얼마 전 중간고사를 본 중학생 우리 딸은 여유가 좀 있다. “나는 시험 끝났다! 너는 아직 멀었지?”초등학생 동생을 약 올린다. 한 마디 대거리를 할 법도 한데 환이는 낑낑대며 문제만 푼다. ‘쌓기 나무’에서 또 헤매는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내게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내일 하자.’며 미뤘다. 고백하건데 나는 수학이 참 싫었다. 잘하고 싶었지
3박4일 동안 긴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동산에도 가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사찰에도 다녀왔다. 그 중 1박2일은 어머니 댁에서 머물렀다. 어버이날과 어머니 생신이 겹쳐 있기도 했고, 집 신축을 앞둔 터라 정리할 게 많아 일손을 거들어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집을 허물고 신축을 하는 터라 일은 곱으로 많았다.어머니 생신 음식으로 준비해간 구절판과 버섯매운탕으로 맛나게 점심을 먹었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6학년 손자의 짧은 편지에도 어머니는 행복해 하셨다.힘쓰는 일은 남편 몫이었다.
비 맞으며 텃밭에 모종을 옮겨 심었다. 떡이 된 흙이 걱정이긴 했지만 땅이 젖어 있을 때 심어야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미리 사놓은 모종을 언제까지 마당 한 켠에 놔둘 수도 없었다. 비닐을 씌우고 고추 모종부터 옮겨 심었다.“널찍하게 심어. 너무 배게 심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니까.”남편의 훈수를 받으며 두 줄로 열을 지어 심었다. “부슬부슬한 흙으로 덮어줘야 고추가 잘 자라. 습기도 안 세 나가고.”초보면서 남편은 농사에 이골이 난 농사꾼 흉내를 낸다.“알겠습니다. 전문가님.”맞장구치며 일을 한다. 신발에는 서 너 근쯤 나가는
여성학자 박혜란씨가 했던 말이다.“살까 말까 고민하는 물건은 사지 않는다. 없어도 불편함이 없는 물건이니까. 갈까 말까 망설이는 여행은 간다. 가면 분명 채워오는 게 있으니까.”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여행이야 마음 따라 흔쾌히 갈 수는 없지만 새로 사려는 물건 앞에서는 그의 말이 좋은 지표가 되어준다. 가능하면 지금 있는 것들 가지고 살다, 덧보태는 일없이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싶다. 지금 있는 옷으로 사계절 나는데 큰 불편 없고, 철따라 몇 켤레씩 바꿔 신어야할 만큼 신발은 많다. 솔직히 옷 색깔에 맞춰 신발을 골라
마주이야기2 어느새 초등학교 최고 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된 우리 집 오누이. 유치원 시절 그들이 나눴던 이야기를 적어두었다 보여주면 이런 유치한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한다. 나는 녀석들의 그 마주 이야기가 참 좋은데 녀석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사는 일이 심드렁해질 때마다 나는 그걸 꺼내 읽고 또 읽다 피식 웃고는 한다. 두 녀석이 스무고개 놀이를 한다. 누나가 먼저 문제 낼 차례.“이것은 털이 있습니다.”“아저씨!”“땡! 틀렸습니다.”“아저씨 털 있는데?”“아니야. 두 번째 힌트! 태양처럼 생겼습니다.”자신 있게 환이
새소리다. 퍼뜩 눈을 떴다. 이게 웬 일이람. 내가 새소리에 아침잠을 깨다니!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 온 지 3개월. 코앞으로 거주지를 옮겼을 뿐인데 생활은 엄청 변했다. 가끔 예전과 딴판으로 변한 내가 낯설 때도 있다. 이게 다 주택으로 이사 와 생긴 일이다.일어나자마자 내가 달려가는 곳은 꽃밭이다. 3평 남짓한 작은 꽃밭에는 금낭화 동백 소나무 감나무 철쭉 난초 같은 식물과 더덕 달래 취나물 고수 상추 같은 야채가 함께 자라고 있다. 옛 주인이 가꾸어놓은 것들이다. 그것들이 밤새 안녕했는지, 얼마나 키를 키웠고 싹을 틔웠는지
“....... 흑, 흑, 흑.......”앞의 말줄임표는 아파서 소리도 낼 수 없다는 몸짓이다. 뒤의 말줄임표는 정말 아프니 아는 척 해달라는 뜻이다. 화장실 문에 얼굴 절반만 내놓고 엉거주춤 서 있는 누나 인이. 동생 환이가 부리는 것은 엄살이 아니란 걸 눈치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삐죽거리는 입매는 그래도 나만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마지막 항거다.환이 발등에 허물이 벗겨져 군데군데 핏물이 배어 있다. 안 봐도 비디오다. 화장실에서 장난치고 놀다 환이가 깐죽댔을 것이다. 몇 번 장난을 받아주던 누나가 문밖으로 환이를 확 밀었을
“엄마, 다음 주에 가정방문 하신대요.”중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안내장을 내민다. 솔직히 부담 백배다. 집안 정리야 틈을 내 하면 된다지만 낯선 선생님과 마주하고 이야기 나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묵직하게 했다.“시간 안 되면 전화로 대신 하신대요.”“그래?”잠시 그럴까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화요일이랬지? 우리 집을 1번으로 해도 되는지 여쭤봐.” 솔직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넉살좋은 남편이 곁에 있을 거니까 나는 꽃처럼 앉아있으면 될 일이었다.그런데 가정방문 당일 남편이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나는 오늘
“엄마, 나 아파요.”아침 준비로 바쁜데 환이가 자꾸 부른다.“어디?”하고 묻는데 환이는 아픈 자리를 찾지 못한다. 손등 손바닥을 뒤집어 가며 아팠던 자리를 찾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다. “분명히 아팠는데......”“천천히 찾아봐.”소매를 올리고 팔뚝까지 돌려가며 상처를 찾는데 없다.“여기요 여기.”가까스로 찾은 상처. 검지 손가락 손톱 밑에 깨알만한 상처가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작은 상처.“어제 학교에서 다친 거예요.”“어유 그랬어. 우리 아들 많이 아팠겠다.”호 불어주며 엉덩이를 토닥토닥 해주었다.“친구가 3
“이게 무슨 나물이야?” “세발나물. 씹히는 식감이 참 좋아. 먹어봐요.”“냉이가 지천인데 이걸 사 먹어?”밥상머리에서 남편에게 지청구를 들었다. 문밖에 냉이가 널려있으면 뭐한가. 내 손으로 캐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일요일 오전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 남편에게“지천에 널린 냉이 캐러 갑시다!”했더니 호미를 챙겨 말없이 따라나선다. 등산 가자면 핑계 대기 바쁜 녀석들도 봉지 하나씩 들고 앞장선다.냉이라고 생김이 다 같지는 않다. 색깔도 크기도 각기 다른데다 언뜻 보면 냉이처럼 생긴 풀이 있어 잘 구분해서 캐야한다.
“폭탄 터진다!”‘아빠 어디가?’ 프로그램이 인기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어린 아이들의 티없이 해맑은 말들의 울림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풍진 탓에 얼룩진 내 영혼이 그들의 영롱한 말로 말끔히 씻기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가끔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엄마인 내가 보일 때 나만의 ‘아빠 어디가?’ 버전을 꺼내서 보고는 한다. 우리 딸과 아들이 말을 배워 열 살이 되기 전 했던 기상천외한 말들을 그냥 두기 아까워 적어놓은 일명 ‘마주이야기(대화)’ 목록이다.# 뭐가 되려고 그러냐?초등학교 입학한 환이 더러 수학문제 좀 풀라고
엄마인 내게 녀석들의 성장의 역사가 담긴 물건은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는 게 없다. 어버이날 내게 내민 첫 편지, 온통 검게 칠해진 그림, 유치원 들어가 처음 입은 체육복, 조가비로 함께 만든 목걸이....... 허투루 내돌릴 수 없어 모아두었던 물건이 커다란 상자에 가득하다. 며칠을 망설이다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엄마, 이게 다 뭐예요?”“우리 딸, 우리 아들 역사가 담긴 보물창고!”“우와! 많기도 하다.”거실에 펼쳐 놓으니 한 가득이다.“내가 이렇게 맞춤법 틀리게 편지를 썼단 말이야?”일곱 살 때 쓴 인이 편지엔 틀린 글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