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도착 500미터 지점. 마중 나와라. 오버.”
“알았다. 오버.”
술 한 잔 걸친 남편의 전화다. 밤 12시를 넘기기 일쑤인 술자리에서 2, 3차의 유혹을 뿌리쳤으니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아빠 마중 가자.”
“오케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밖에 나섰는데 오락가락하던 소낙비가 멎었다. 마실 가는 기분으로 몇 걸음 떼었는데 아무래도 하늘이 수상하다.
“소낙비 올지 모르니 서둘러 가자.”

저만치 담장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기다리는 남편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람. 상봉의 순간 장대같은 비가 쏟아진다. 대어급 소낙비다. 삽시간에 흠씬 젖었다.
“저기 피자집에라도 들어가자.”
“그래, 그래.”
“오케이.”
이 늦은 밤 녀석들은 횡재했다.
“맛있다.”
쏟아지는 비가 걱정이 되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엄마는 다이어트 중이야?”
인이가 피자 한 조각 건네며 먹으란다.
“아무래도 금세 그칠 비가 아니지?”
“그러게. 근데 당신 멋지다. 2차 유혹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훌륭한 아빠를 위해서 박수!”
“박수!”
“우리 아빠 최고!”
아빠가 쏜 피자에 마음 빼앗긴 녀석들의 푸짐한 말 인심.
“이 가게는 10시면 문 닫는데 어쩌지?”
“우산 좀 챙겨오지 그랬어.”
“내가 엄마보고 우산 챙기자 하려다가 그냥 안했어.”
하나마나한 환이 말을 귓등으로 듣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
‘저 비 맞으면 재미있겠다. 어렸을 때처럼.......’
그래서 긴급제안을 했다.
“우리 저 비 맞고 집에 가자.”
“저 소낙비를 맞고?”
“비에 쫄딱 젖을 텐데 엄마?”
“엄마, 나는 싫어.”
제각각 반대 의사를 표시한 세 사람.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태도를 바꿔
“좋아. 가자.”
하며 앞장 서는 게 아닌가. 술기운 때문이리라 짐작하며 따라나섰다. 두 녀석은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비 맞는 것도 나쁘지 않네. 그치?”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동의를 구하자 병아리처럼 아빠를 따르던 두 녀석이 피식 웃는다.
“엄마, 사실은 재밌다.”
“나도 나도.”
녀석들은 이미 소낙비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엔 공모자의 연대감이 서려있었다.
때맞춰 굵어진 빗줄기.
“뛰어!”
남편의 명령에 우리는 냅다 내달렸다. 녀석들은 아빠를 앞질러 달리며 낄낄거렸다. 서너 발짝 뒤쳐진 채 달리며 나는 진짜 신났다. 나이 마흔 넘어 주책이다 싶게 즐거웠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색다른 자유인가.
“달려! 달려!”
늘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도 이미 체면 따윈 벗어던졌다. 비가 고여 있는 곳을 골라 첨벙거리며 아주 신이 나셨다.
“저걸 어째!”
골목으로 들어서다 마주친 아주머니 한 분이 혀를 끌끌 찬다. 우리의 신나는 놀이를 이해 못한 눈치다.

“으하하하하.”
“히히히히히.”
“푸하하하하.”
“크크크크크.”
물에 빠진 생쥐 4마리가 대문 앞에 서서 웃음 폭탄이 터졌다. 서로의 모습이 가관이 아니다.
“비 목욕 한 번 잘~ 했다!”
환이의 마지막 멘트 덕에 하루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역시 우린 사랑스런 한 가족이다. 물에 빠진 생쥐 4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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