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 출신 왕명강, 일제강점기 해남읍에 포목점 열어
아들은 목포로 건너가 1950년 ‘중화루’ 개업 현재는 손자가 운영

김정구가 1937년 취입해 부른 ‘왕서방 연서’라는 노래가 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다소 익살스런 가사와 창법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던 이 노래의 주인공이 해남에 살았다면? 그렇다. 해남에 비단장수 왕서방이 살았었다. 노래와 다른 점은 비단을 팔아 모은 돈을 명월이에게 갖다 주지는 않았고, 되레 요정도 함께 운영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추적하기 위해 눈이 내리던 날 목포 무안오거리 근처에 있는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를 찾았다. 주인은 ‘58년 개띠’라는 왕윤석 사장. 간판에 쓰여 있는 ‘SINCE 1950'이 말해주듯 꽤나 내력이 있는 집이란 걸 알 수 있다. 왕사장의 기억을 빌려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왕사장의 조부(왕명강)가 조선에 건너온 것은 임오군란(1882)으로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19세기 말이다.

동생 두 명과 함께 산동성 래양시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조부는 처음에 인천에서 일하다 해남에 정착하게 된다. 왕 사장의 원적이 삼산면으로 돼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대흥사 입구 구림리 장춘마을에 터를 잡았을 걸로 보인다. 당시 장춘은 해남 최초의 소학교가 있었을 만큼 사하촌(寺下村)으로 흥청거리던 때였다. 해남으로 내려와 해남 윤씨 규수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조부는 해남읍내 예전 중앙극장 근처에 포목점을, 그리고 남동리에 요정을 같이 운영할 정도로 제법 자리를 잡았다.

‘묻지마라 갑자생(1924)’인 부친(왕서은)은 조부를 도와 일을 하다 일제말기 관동군에 징집되면서 가게를 접은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이 되면서 관동군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지내던 부친은 6.25가 나기 직전에 처가인 목포로 내려온다. 그리고 처가 쪽 친척이 운영하던 식당을 인수해 수복과 함께 ‘중화식당’을 개업하니 중화루의 시작이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으로 건너온 화교 1세대들은 당시 우스갯소리로 세 개의 칼을 가져왔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했다. 비단을 자르는 칼과 단발령(1895)이후 머리카락을 자르던 가위 칼, 그리고 식당에서 음식재료를 다듬던 식칼이 그것으로 왕사장의 조부는 포목 칼을 들고 들어와 부친대에 중국음식점을 여니 두 개의 칼을 사용한 셈이 된다.

일제강점기 포목점을 하던 조부는 등짐을 지고 우슬재를 넘어 옥천 5일장을 걸어다닐 정도로 부지런했다. 일제의 중국인 차별대우를 견디다 못한 동생들은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고 조부만 남았다는데 이처럼 지독한 조부의 근면은 이 집안의 가풍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일제의 대동아전쟁시기와 맞물려 징병으로 끌려가야 했기에 오죽하면 ‘묻지마라 갑자생’이라 불리던 부친은 조부가 물려준 근면을 바탕으로 전쟁통에 중국음식점을 개업해 한때 종업원이 2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다.

중화루의 별미는 ‘중깐’이라는 음식이다. ‘중화루 간짜장’의 줄임말로 중깐은 유니짜장의 일종인데 부드러운 면발과 함께 아삭아삭 씹히는 양파의 식감이 일품이다. 목포에서 화교들이 운영하던 중국음식점 가운데 이제는 홀로 남은 중화루도 이젠 왕사장 대에서 그칠 것으로 보인다. 왕사장의 아들이 음식점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중화루를 나서니 눈발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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