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어느 날 독일의 문호 괴테는 렘브란트가 스물두 살 때 그린 자화상을 보고나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는 생명이 없는 시신과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라고. 이후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으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후일 독일 청년들의 모방 자살을 나타낸 ‘베르테르 효과’의 원형이 된다.

17세기 유럽미술사에서 벨라스케스(스페인), 루벤스(벨기에)와 더불어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렘브란트(1606~1669)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했고 불우했다. 흔히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는 유난히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지금까지 70여 점의 자화상이 전해진다.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라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것도 불과 1886년부터 죽기 한해 전인 1889년까지 4년동안 43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의 본격적인 화가인생이 10년 남짓인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숫자다.

‘사람들은 말하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자기 자신을 그리는 일 또한 어려운 일이야. 램브란트가 그린 자화상들도 그가 자연을 관찰한 것보다 더 많아. 그 자화상들은 일종의 자기고백과 같은 것이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고지식하고 자기학대에 가까운 강박증이 심했던 고흐는 친구도 별로 없었고. 모델을 쓸 돈도 없었다. 그런 환경적인 조건이 자화상을 많이 남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국립광주박물관이 가을 기획특별전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전을 지난 21일부터 열고 있다. 전시회는 공재를 비롯해 그의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76), 손자 청고(靑皐) 윤용(尹熔,1708-1740)에 이르는 3대에 이르는 서화 세계를 조망한다. 호에 '재(齋)' 자가 들어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세 사람을 가리켜 '삼재(三齋)'라고 한다.공재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이 그들이다.

공재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 지정됐을 만큼 걸작중 걸작으로 꼽힌다. 조선회화사를 통틀어 자화상이라는 희소성도 반영됐겠지만 강렬한 눈빛과 세밀한 기법이 돋보이는 공재의 자화상은 마치 보는 이에게 “너는 누구냐?”며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자화상은 그린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렘브란트와 고흐의 경우도 그러했고. 당파싸움으로 벼슬길을 접어야했던 공재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시회에 즈음해 다시 보는 공재의 자화상은 당리당략으로 편가르기를 일삼는 정치판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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