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달 너구리는 농촌과 삶의 주변부를 그려온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이시백 작가의 신작 소설이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몫’이란 주제의 대담을 통해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설가로서의 고민과 생각을 진지하게 풀어낸다.

칠팔십 년대가 아닌 작금의 농촌의 모습과 그 안에서 전도되어 일어나고 있는 의식들, 그리고 여전히 삶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민중이라 지칭되는 인물들의 여러 층위를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마을의 이장 선거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연평도와 4대강, 그리고 빨갱이로 통칭되는 이데올로기의 강박적 의식을 담아낸 [잔설], 첫사랑 ‘영심’을 잊지 못해 벌어지는 ‘재선’의 에피소드를 통해 ‘구제역’의 한 단면을 묘사한 [백중], 번지 없는 주막을 운영하는 욕쟁이 할머니와 ‘마지막 주막’을 보여주며 ‘4대강’과 정치적인 실책들을 풍자한 [번지 없는 주막], 학생들을 취업시키기 위해 애쓰는 노 선생의 모습에서 실업계 학교들이 어떻게 자본화되는가를 드러내고자 한 [구사시옷생(九死ㅅ生)] 등, 《응달 너구리》에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지 못하는, 근대 문화유산 정도로 취급되는 농촌의 모습과 기만당하는 민중의 모습이 소설로서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응달 너구리에서 보이는 농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전원일기의 풍경으로만 기억되는 농촌의 가짜 얼굴을 작가는 거침없이 벗겨내고, 이제 그런 공간은 우리 주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괴롭고 버겁고 불편하더라도 농촌의 진짜 얼굴을 직시하라고 말이다.

대담에서 작가는 어떤 현실이나 역사적인 의식을 갖는 것, 즉 리얼리스트로서의 소설이 결코 소설의 변방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교조적이고 전형화된 민중문학에 독자들이 싫증” 났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리얼리즘 문학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웃기며 미학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나는 꽃 도둑이다》가 그랬고 이번 소설이 그렇다.

소설 속 인물들이 ‘무르춤하다’, ‘엽렵하다’, ‘불뚱가지’ 같은 도시에서 살아온 이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단어들을 내뱉는 이유는, “우리가 쓰는 어휘는 어떤 평론가나 어떤 대학 교수보다 시골장에서 만난 나물 파는 할머니나 국밥집 할머니가 더 풍성할 수 있”다는, 어쩌면 그것이 농촌이 가진 미학의 결정적 지점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멸종 언어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누구에게는 ‘삶의 응달에서 건져낸 꽃잠 같은 언어’이기 때문이며, 한국 문학의 깊은 잠에서 건져낸 소중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우리가 서 있는 응달에 던져준 열한 편의 소설은 우리가 건져내야 할 ‘꽃잠 같은 삶’임에 틀림없다.

“결국은 돈이여. 돈이믄 ?는 사람두 모이구, 있든 사람두 갈라스게 허는 게 돈이여.”

[흙에 살리라]의 황 노인의 말도막 하나가 우리 앞을 턱 하니 가로막는다. 여기만은 아니겠지 했던 농촌도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자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건 가능한 일일까? “낮에는 아파트 경비 일을 하거나 공장에 나가고, 있는 땅은 놀리기 뭐해서 부업 식으로 하는 거죠.” 작가는 대답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건 옛말이다.

이 사회는 더는 농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는 세대를 생산해 내지 않는다. 농촌에서 사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농촌에서 살아가는 걸 뜻하지는 않게 됐다. 바꿔 물어보자. 농촌 소설이 읽히는 건 가능한 일일까? “……책을 안 보기도 하고.” 작가는 대답한다. 농촌 소설이 읽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앞서 소설이 읽히는지를 살펴보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농촌이란 커다란 은유를 통해서 무엇을 보려고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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