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뜸 했던 철새가 올 겨을 들어 다시 고천암을 찾와왔다. 저녘 무렵 가창오리의 군무는 장관을 연출한다.

“고천암(庫千岩)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갈대였다. ‘고천후조(庫千候鳥)’라 해서 해남8경으로 고천암 철새를 꼽고 있지만 내가 먼저 만난 것은 갈대였고. 그래서인지 내게 있어 고천암 갈대는 강렬한 영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2003년 12월 성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해남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나는 저녁 무렵 고천암을 찾아갔다. 인생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해도 막상 한 시절을 머물렀던 곳과의 이별은 먹먹하기 마련이어서 무언가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질 무렵 고천암은 고혹적이었다. 방조제너머 만호바다로 지는 해와 바람에 끌리는 갈대의 군무. 그러나 겨울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갈대 우거진 그 길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사위(四圍)가 좁아드는 어두운 적막에서 우수수 바스러지는 갈대의 파열음은 순간 지독한 공포로 엄습해 왔다. 그리고 먼발치의 희미한 불빛을 이정표 삼아 숱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고천암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 우리나라 4대 갈대밭의 경우

내게 고천암 갈대 못지않게 감동적이었던 풍경은 경기 화성시 송산면 시화호에 있는 우음도(牛音島) 갈대밭이었다. 화성 공룡알 화석지 주변인 이곳은 시화방조제로 바다를 막으면서 생겨났다. 우음도라는 섬이 통째로 육지와 맞닿으면서 바다는 광활한 갈대밭으로 바뀌었고. 덤으로 공룡알 화석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의 갈대는 마치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을 연상케 한다. 갈대밭 사이로 이름 모를 펑퍼짐한 나무가 군데군데 자리 잡은 풍경은 영락없는 세렝게티다. 저녁 무렵 불게 물들면 그러한 느낌은 더욱 또렷해진다. 사뭇 몽환적이다. 마치 공룡이 뛰어놀던 원시의 자연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은 지난 2013년 3월에 제2 서해안고속도로로 불리는 평택~시흥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접근이 쉬워졌다. 그러나 송산그린시티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갈대밭은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이다. 지금은 송산그린시티 전망대가 새로운 명물로 등장했지만 갈대밭 사이로 비포장길을 따라 우음도로 가던 검은 전봇대, 그 묵묵한 순례의 행렬과도 같은 풍경은 속도에 밀려 오래된 흑백사진으로 남고 말았다.

갈대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충남 서천의 신성리 갈대밭이다. 여름이면 야생화와 어우러져 마치 청보리밭을 연상케 하는 신성리 갈대밭은 만추에 누렇게 익으면서 갈대는 마치 숲처럼 무성해져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 갈대밭의 위용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로 더욱 유명해졌다. 옛날 신성리 주민들은 갈대를 꺾어 빗자루를 만들어 쓰기도하고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갈비’라 불리는 신성리 특산품이기도 했던 빗자루는 갈대가 쇠기 전에 꺾어다, 삶아 만들면 10년은 족히 썼을 정도로 질이 좋았다.

고천암, 시화호, 신성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갈대밭으로 곱히는 순천만은 국제정원박람회로 급속히 유명세를 타면서 국가명승 제41호로 지정된 곳이다. 갈대꽃이 피고 칠면초가 붉은빛을 띠며 흰색의 철새가 날아오르는 광경은 그대로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갈대밭 풍경으로 명불허전인 것이 부산에 있는 을숙도다. 명품 갈대밭 풍경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을숙도는 이미 영상으로 친숙한 곳이다.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황지우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을숙도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을숙도는 그렇게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들 낙원이었다.

 

▲ 해남읍 부호리에서 화산면 연곡리까지 3km의 갈대밭은 55만평으로 국내 최대의 갈대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 국내 최대의 고천암 갈대밭과 가창오리의 군무

처음에는 의아했다. 이름만으로는 오래된 암자가 있는 줄 알았다. 그랬던 것이 ‘바위 암(岩)’자가 붙은 것을 알고 나서는 어찌 해서 광활한 간척지에 바위이름이란 말인가, 했었다. 그러나 1988년 방조제로 바다가 가로막히기 전 이곳에 고천암이란 바위가 있었고. 능히 천 개의 곳간을 채울 수 있는 곳이라는 풍수지리상의 신통방통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데서 고천암은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놀라운 예언의 주인공인 고천암은 화산면 입암리 북쪽 선들개에 있다.(한국지명총람) 일설에는 황산면 징의리 선착장 방파제에 있는 바위를 고천암이라고도 한다.

고천암 방조제는 해남 방조제라 부르는데 징의리에서 화산면 율동리에 이르는 구간에 조성됐다. 고천암호는 황산면과 화산면, 그리고 해남읍 사이에 있는 호수로 본래 해남천과 삼산천의 하구로 밀물 때면 하천 주변의 간석지가 바닷물에 잠기고는 했다. 방조제가 조성되면서 안쪽은 호수로 바뀌었고, 주변으로 관활한 간척지가 생겨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천암의 예언이 맞았다며 놀라워했다.

해남읍 부호리에서 화산면 연곡리까지 3km의 갈대밭은 55만평으로 국내 최대의 갈대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광활한 갈대밭에 월동을 위해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드는 것이다.

내가 고천암 가창오리의 군무를 관찰한 것은 2008년 2월 초순경이었다. 저녁 무렵 일제히 비상하는 가창오리떼는 장관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섬뜩한 공포였다. 수 만 마리의 오리들이 순간 ‘휘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올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로는 가창오리가 고천암에서 사라졌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야긴즉슨, 해남소방서에서 인명구조용 보트를 구입해서 시운전을 고천암호에서 하게 됐는데 대낮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모터 소리에 혼비백산한 가창오리들이 ‘꽥꽥’ 울부짖으며 날아올라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9년에 일어난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오리의 실종과 관련해 한동안 정설로 굳어졌다. 오리떼의 부재는 5,6년 동안 계속됐다. 그렇게 영암호와 영산호로 서식지를 옮겼던 가창오리가 올 들어 다시 고천암으로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영암호가 내수면어업허가로 소란스러워지면서 고천암 귀환이 이뤄진 것으로, 가창오리는 수컷 머리에 태극무늬가 또렷해서 태극오리, 또는 반달 오리로도 불린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20여 만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아 국제보호조류로 지정돼 있다. 고천암호에 날아드는 가창오리의 수는 적으면 수 만 마리에서 많을 때는 20만 마리를 헤아린다. 지구상에 남은 가창오리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월동하는 셈이다. 그리고 어디서나 흔한 청둥오리, 고방오리, 아메리카홍머리오리, 검둥뺨오리, 민물도요, 노랑지빠귀, 큰기러기, 쇠기러기 등은 물론 고니(천연기념물 제201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호), 독수리(천연기념물 제243호) 등과 같이 희귀한 새들도 종종 눈에 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천연기념물 제199호)와 먹황새(천연기념물 제200호)가 발견되어 학계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동안 조류는 54종(미확인종 제외)이 관찰됐으며 수금류 33종, 맹금류 5종, 명금류 및 기타 조류는 16종이 발견된 그야말로 철새들의 낙원이다.

 

 

◆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수로 낚시의 천국

 

고천암은 철새의 낙원으로 알려졌지만 수로 낚시의 천국으로 강태공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바다로 향하던 해남의 하천은 방조제가 놓이면서 250만 평의 간척 수로를 만들었다. 해마다 얼음이 풀리는 2월부터 월척을 배출하고, 산란기인 3~4월의 노다지 조황으로 인기가 높은 고천암의 수로는 해남 수로와 삼산 수로(해창 수로)를 비롯해 길호 수로(남천 수로), 황산 수로(용골 수로), 원호 수로, 짜장(?) 수로가 있다. 고천암의 수로는 폭이 좁고 갈대와 부들이 혼재해 초보자들도 짧은 대와 긴 대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삼산천이 만들어 낸 삼산 수로는 해창교와 금풍교, 신풍교, 연곡교가 나란히 걸려 있을 정도로 10km의 물길을 자랑한다. 이 수로 주변으로 고천암의 드넓은 갈대밭이 펼쳐진다.

 

◆ 무엇을 위한 자연생태공원인가

지금 고천암에서는 자연생태공원 조성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해남군이 240억원의 사업비로 고천암호의 생태 서식여건 개선과 생태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해 오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고천암 자연생태공원 조성사업은 둔치 물골과 생태림 등 생물서식기반을 조성하는 것과 생태수로를 설치하고 훼손된 고수부지에 갈대를 조성하면서 수질개선에 나서는 한편 생태체험시설인 조류관찰센터와 탐조대도 함께 만든다는 것이다.

이 사업은 지난 2006년 입안돼 2008년부터 타당성 조사용역을 시행했으나 그동안 한국농어촌공사와의 부지사용 협의와 농업진흥구역 해제 등으로 사업추진에 다소 늦어졌다. 자연생태공원 조성사업은 쉽게 말해 고천암호 철새와 갈대를 관광자원화 한다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 하는 친환경적인 생태공원 조성과 생태관광의 인프라 구축으로 많은 탐방객이 찾아오도록 한다는 취지다.

생태공원 사업을 보면 고천암호 수질 개선, 제방가로수 식재, 2곳의 에코센터 건립, 철새 탐조대, 조류 관찰 탐방로, 갈대 탐방로, 생태 학습장 조성 등이 눈에 띈다. 아울러 철새들을 위한 먹이 확보를 위해 생물 다양성 관리 계약과 볏짚 존치 등을 확대해 나갈 계획으로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은 그리 순조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곳곳에서 사업의 어설픈 모습이 드러나고. 생태공원이 오히려 갈대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도로변의 갈대는 탐방로 조성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며 갈대밭에 심어놓은 정체불명의 나무는 오히려 경관을 해친 꼴이 되고 말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자연스러울 때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법이다. 단순히 편리만을 쫒기 위해 인공을 가미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사람들은 고천암의 자연을 보러 오는 것이지. 놀이동산처럼 번잡한 시설물을 즐기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다. 막대한 예산을 굳이 자연에 거스르는 사업에 생태공원이라는 명분으로 써야만 하는 것인지. 자연과 생태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여타지역의 생태공원 따라 하기로 밖에는 이 사업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는 것이다.

 

▲ 천개의 곳간과 맞바꾼 바다, 그리고 고천암호
◆ 천 개의 곳간과 맞바꾼 바다

다시 찾은 고천암은 평화로웠다. 방조제를 건너 해남배수갑문에 이르러 바라다보는 풍경은 여전히 시원한 눈맛을 선사한다. 방조제너머 만호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고천암 간척지의 대비는 묘한 감동을 준다. 이 너른 평야가 예전 해창만으로 밀려들던 바다였다니. 한 시절 해남의 관문이었을 바다는 방조제가 놓이면서 뱃길이 막혀 버렸다. 육지로 변한 바다. 상실된 갯벌면적만도 33㎢에 달한다고 한다. 전남도는 최근 보성갯벌 23㎢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키로 했다. 이에 비춰볼 때 사라진 해창만의 갯벌의 가치가 어떠한 지는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고천암은 천 개의 곳간을 채울 수 있는 곡식과 맞바꾼 바다가 아닌가. 자연의 바다를 인공적으로 뭍으로 만든 지금. 자연생태 운운하며 다시 자연을 말하는, 이 엄청난 모순을 어쩌란 말이냐. 나는 이러한 모순된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척지 사이로 난 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다시는 길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