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나는 본래 우전(于闐)국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 불(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저는 아유타(阿踰陀)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부모님 꿈에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고 해 가락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을 만난 허황후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건넨 말이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아유타국’이 어디냐를 놓고 학자들 간에 이설(異說)이 분분하나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또 김해 김수로왕릉에는 ‘쌍어문(雙魚紋)’이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문장은 고대 페르시아의 신어(神魚)인 ‘가라(kara)’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가락국, 즉 가야의 별칭이 ‘가라(加羅)’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쌍어문은 흥미롭기만 하다.

 

◆서역 땅 우전국에서 온 금인

달마산 미황사 창건설화에도 허황후 만큼이나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숙종 18년(1692)에 병조판서 민암(閔黯,1636~1694)이 지은 ‘미황사 사적비’를 들여다보자.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8월에 돌로 만든 한 척의 배가 달마산아래 사자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다가갔지만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이 말을 들은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스님들과 동네 사람 100여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니 금인(金人)이 노를 젓는 배가 다가왔다.

배 안에는 화엄경(華嚴經) 80권, 법화경(法華經) 7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문수보살(文殊菩薩),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그리고 탱화(幀畵), 금궤, 검은 돌 등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나는 본래 우전(于闐)국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 불(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의조화상이 금인의 말대로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한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인이 왔다는 우전국은 어디일까. 우전국은 신장(新彊) 위구르 자치구의 타림분지 서남쪽에 있었다. 말하자면 ‘서역(西域)’ 땅인데 이곳은 오래 전부터 우전현으로 불리다가 1959년 화전(和田)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로 곤륜(崑崙)산맥의 북쪽과 접해 있다.

‘북사(北史)’의 ‘서역전(西域傳)’에 보면 ‘우전에서는 모든 백성이 불법(佛法)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찰과 탑과 승려들이 대단히 많다. 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육재일(六齋日)을 지키고 불단에 올리는 곡물이나 과일을 손수 씻는다’고 적혀 있다.

 

◆‘대방광불화엄경’과 비로자나불

우전국은 화엄경을 꽃피운 곳으로 60화엄경이나 80화엄경 모두가 이곳에서 발견돼 중국으로 건너간 걸로 봐서 화엄경이 우전에서 편찬 또는 집대성 됐을 것이다.

이렇게 집대성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에는 3종류가 있다. 첫째는 중국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 화엄경이고, 둘째는 당나라 시대에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번역된 80권 화엄경, 셋째는 같은 당나라 시대에 반야삼장(般若三藏)에 의해 번역된 40권 화엄경이다.

여기서 40권 본은 60권 본과 80권 본 중의 ‘입법계품(入法界品)’만 따로 독립시켜 만든 것이므로, 완전한 화엄경은 60권 및 80권 화엄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의 정확한 제목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대방광’이란 뜻은 부처님에게 붙인 형용사로 ‘크다’는 뜻이다.

즉 ‘대방광불’이란 ‘광대한 부처님’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존재하고 있는 무한한 부처님, 무한대의 부처님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은 ‘비로자나불’로서 광명의 부처님을 말한다.

김법린(金法麟1899~1964)과 함께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불자로 ‘활불(活佛)’로까지 불리던 백성욱(白性郁,1897~1981)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1929년 ‘대방광불화엄경’을 제창했다.

누구나 ‘대방광불화엄경’을 일심으로 독송하면 모든 재난은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내무부장관과 동국대 총장을 지낸 백성욱은 한 때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김일엽의 연인이었다.

그는 부천 소사에 ‘백성농장’을 운영하며 제자들에게 ‘금강경’을 독송하고 ‘미륵존여래불(彌勒尊如來佛)’의 명호(名號)로 시봉(侍奉)할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정황으로 유추해 볼 때 미황사 창건설화는 상당한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전국이 그렇고, 화엄경 80권과 비로자나불이 또한 그렇다.

미황사와 비슷한 창건설화를 가진 절로는 경기 평택시 현덕면에 있는 심복사(深福寺)가 있다. ‘파주 문산포에 살던 어부 천을문이 고기를 잡으러 왔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니 돌로 만든 불상이 올라왔다.

비로자나석불이었다. 불심이 깊었던 천을문은 치성을 드리고 모실 곳을 찾았는데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내일 바닷가에 가면 임자 없는 검은 소와 난파된 배가 있을 터이니 그것을 실어다 절을 짓도록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심복사에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난파선의 목재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공양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가보니 난파선으로 지었다는 공양간은 온데간데없고.

번듯한 새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그런 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란. 꼭 신화를 도둑맞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고창 선운사의 창건설화에도 검단선사가 죽도 포구에서 돌배를 맞아들이는 내용이 있는데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 부처, 그리고 금인 등이 미황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선운산 꼭대기에는 ‘배맨바위’가 있는데 혹시 이 돌배를 매어 둔 바위는 아닐는지. 그저 경이롭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 미황사 대웅전 주춧돌엔 게와 거북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불교 남방전래설과 민암의 사적기

 미황사의 창건설화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허황후 이야기는 모두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연관이 있다. 불교 남방전래설은 4세기말 중국을 통해 불교가 들어왔다는 통설과는 달리 1세기경 가야와 전라도 해안지방으로 바닷길을 통해 직접 전래됐다는 것이다.

남방전래설은 구체적인 고증자료가 없어 문제로 남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볼 때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미황사에는 심복사의 비로자나석불이나 난파선으로 지은 절집과 같은 설화에 등장하는 어떠한 유물도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대웅전의 주춧돌에 새겨진 게와 물고기, 거북 등 바다 생물의 조각들에서 남방전래설의 단초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나 사적기를 지은 민암은 “돌배와 금인의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속된 귀로는 의심이 갈 만 하지만 연대를 따져 고증 하려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미황사에 가면 경전과 금인 탱화 등이 완연히 있다”고 밝혀 당시까지만 해도 설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검은 소의 이야기도 다분히 불교적이다. 절에 가면 대웅전 등 법당의 외벽에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소가 등장하는 심우도(尋牛圖)다. ‘소를 찾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소는 인간의 본성(本性), 동자(童子)나 스님은 불도(佛道)의 수행자에 비유해 선의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각 단계마다 한 장면씩 그려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심우도에 등장하는 소는 대개 검정색인데 이는 삼독(三毒 - 탐(貪, 탐욕),진(瞋, 노여움),치(癡, 어리석음))에 물든 수도자의 마음을 보여주며 이후 마음을 닦아감에 따라 소는 점차 흰 색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결국 본성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나타난 소는 화면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황사 아랫마을인 서정리에는 ‘우분동(牛墳洞, 쇠잿등)’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지만 평택 심복사 앞에는 검은 소 무덤이 있어 이러한 설화를 뒷받침 하고 있다.

 

▲ 도솔암은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웠다. 미황사의 열 두 암자 중의 하나다. 달마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솔암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달마대사의 법신이 늘 상주하는 곳’으로 나와 있다.
▲ 일주문을 돌아드니 길가에 애기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해남8경의 으뜸 ‘달마도솔’

첫 눈이 내린 다음 날 미황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돌아드니 길가에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애기동백이다. 여느 동백보다 서둘러 꽃을 피운다는 애기동백. 아직은 수줍은 동백과 가벼운 인사를 하고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으로 가는 돌계단을 오른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을 한 대웅전 너머로 달마산의 암릉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우리나라 명승 59호로 선정된 미황사는 달마산과 어우러진 화장기 없는 대웅전과 응진당(보물 제1183호)이 백미다. 나머지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불사가 진행 중인 미황사는 10여 년 전 처음 찾았을 때와는 달리 성장(盛裝)을 한 여인의 모습이어서 예전의 운치는 많이 사라졌다. 불심이 깊어져야 하는데 물심만 깊어지는 것은 아닌지.

미황사는 1887년, 절의 중창불사를 위한 ‘서산대사진법군고단’ 40여 명을 태운 배가 완도 청산도를 가다가 풍랑으로 뒤집혀 스님 한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살하는 바람에 폐사가 됐던 아픈 과거가 있다. 지금의 미황사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경으로 자운, 현공, 금강 스님이 들어오면서 부터다.

달마산에는 미황사 못지않게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절집이 있다. 도솔암(兜率庵)이 그곳인데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소문이 나면서 해남 8경의 으뜸(달마도솔)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도솔암은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웠다.

미황사의 열 두 암자 중의 하나다. 달마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솔암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달마대사의 법신이 늘 상주하는 곳’으로 나와 있고,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도 이곳에서 수행정진 했다고 전해진다.

달마대사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반야다라존자의 제자로 출가한 뒤 중국으로 건너간다. 양나라 무제와의 문답을 통해 아직은 법을 펼 때가 아니라 생각한 달마는 숭산의 소림굴에서 9년 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면벽한다.

그리고 선종의 2대 조사인 혜가를 만나 법을 전해주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베트남, 일본 등이 달마를 선종 초조(初祖)로 모시고 선 수행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달마의 행적이나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은 없다.

과거 중국인들은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 이 곳 달마산이라며 이를 부러워했다. 과연 제자에게 법을 전한 달마는 바다를 건너 이곳 달마산으로 들어온 것일까. 그렇다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달마산의 설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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