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기미 3·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도 벌써 96년을 맞게 된다. 애국충절의 고장 해남에서도 항일 독립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때 활약했던 애국지사님들을 소개하며 그날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옥천 영신리 출신으로 이준열사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1902년 손병희, 오세창선생등과 일본 동경에서 만나 동학에 입교한 후 서울에서 천도교 중앙종부를 결성해 무사, 좌부도사로 활동하다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후 1919년 10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정암 송봉해 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쳐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셨다. 해남읍에서 고려의원을 개업하고 인술을 베풀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하셨다. 이승만, 박정희등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시다가 1971년 별세하셨고 그 후 28년만인 1998년 국민의 정부인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에야 그 유가족이 훈장과 포상을 수여받았다.

또한 1919년 4월6일 해남읍 장날 해남보통학교 김규수학생 외 53명이 주동된 기미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들과 청년 등 군민들은 광목과 종이, 물감 등을 구입해 소·중·대형 태극기 800여개를 제작하여 5월1일까지 6차례나 고도리 해남장터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궐기했다. 이밖에도 삼산, 화산, 송지, 북평, 옥천, 계곡,마산, 산이면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됐다.

4월 24일 문내면 우수영 장날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우수영 보통학교 학생 윤인섭 등 10여명이 주동이 되어 청년 이상순까지 20여명이 주동하여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매 장날마다 500여 명씩 네 차례나 궐기하였다.

전국의 어느 고장보다 규모와 궐기회수가 가열 된 해남의 3·1독립만세 운동으로 1명이 옥사하고 74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1년씩 옥고를 치렀으며 수백 명이 갖은 고문과 태형 등으로 홍역을 치렀다. 1592년 임진왜란부터 1597년 정유재란, 1636년 동학농민 혁명군 진압, 1909년 대흥사 심적암에서 항일의병 참살, 1919년 기미 3·1 독립만세운동과 191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 1931~34년 전남최대의 항일운동써클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등으로 337분이 희생되었다.

우리고장 해남은 전국의 어느 고장보다도 활발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가 희생되신 순국열사와 애국지사님들의 애국, 애족정신을 길이 보존하고, 그 희생정신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난 2013년 7월 우슬재 해남광장에 해남출신 337분의 항일독립운동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합동추모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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