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탑동석탑을 '전형적인 신라계 이중기단을 사용하고 평박광대한 옥개석과 모서리 부분의 반전 등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간직학 있어 문화재 자료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치욕의 일제 강점기는 우리 문화재에게 있어서도 수난의 시기였다. 당시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공식 확인된 것만 6만 7000여점에 달한다. 개인 소장 등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20만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는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은 채 실종된 상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왕릉이나 분묘의 도굴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만행은 고려청자와 같은 귀중한 매장 유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또한 사찰이나 폐사지에 있던 석탑이나 석물들도 이들의 표적이 돼 밀반출 되거나 마구잡이로 훼손되는 등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최근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청자 최대 장물아비였음을 보여주는 문헌이 공개됐다. 김상엽 문화재청 감정위원이 펴낸 ‘한국 근대 미술시장사 자료집’에서다. 지난해 일본 시민단체가 1965년 한·일 회담 관련 문서 공개를 요구한 일이 있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를 거부한 문서 중 하나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 수집 고려 도자기 목록’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수난의 역사

일제 수난의 우리 문화재 가운데 석탑의 경우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 86호)이 대표적이다. 일본 정부의 궁내부 대신이었던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1906년 고종의 하사품이라며 일왕에게 선물한다는 구실로 경기도 개풍군 부소산 기슭에 있던 경천사지 탑을 무력을 동원해 일본으로 밀반출 한다. 일찍이 1902년 이곳의 고적을 답사하고 보고서를 남긴 미술건축사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조선미술사’에서 “고려 탑파 중 가장 변화가 풍부하고 세련된 기교를 자랑한다…

이런 종류의 건축은 중국에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던 바로 그 탑이다. 기단부에서 3층 부분까지 만도 각 층 몸체가 20여 조각이나 되는 석탑은 운송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고 복원조차 못한 채 일본 땅에 10년 이상 방치됐다. 1918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의 노력으로 다시 조선 땅에 돌아왔지만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방치됐다 복원된다. 하지만 대체한 쇠 부자재가 녹이 슬고 곳곳에 틈이 생겨 결국 1995년 재해체 한 뒤 10년간의 대수술을 받고 오늘에 이른다. 경천사지 탑의 일본 밀반출은 한일병합이 있기 전의 일로 경술국치는 확실히 또 다른 문화재 수난사의 촉진제가 됐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경복궁에서 벌인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는 그러한 사례의 전형이었다. 9월 11일부터 10월 말까지 50일 간 열린 박람회장의 야외 전시 유물로 삼겠다는 핑계로 경기도 개성과 이천, 강원도 원주, 충북 충주 그리고 멀리는 경북 경주에서 무수한 석탑과 석불과 철불과 부도와 비석이 잇달아 박물관으로 옮겨진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 약사불, 감산사지의 석불상, 개성 남계원지 7층 석탑, 이천 안흥사 5층 석탑, 원주 영천사 보제존자 사리탑,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등이 제자리를 벗어나 서울로 옮겨진 것은 모두 이때의 일이었다.

일본으로 반출될 뻔한 탑동 석탑

 겨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 86호)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1918년 다시 조선 땅에 돌아와 복원됐다.

옥천면 청신리 탑동마을 5층 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78호)도 예외 없이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해남과 강진의 경계를 이루는 덕룡산(德龍山) 자락에 위치한 용혈암(龍穴庵)이라는 사찰에 있었던 이 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마산면 산막리 공세포(貢稅浦)를 통해 반출하려다 날씨가 여의치 않아 출항하지 못하고 해체된 상태로 있었던 것을 지역주민들이 우마차로 실어와 탑동마을 앞에 옮겨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일까.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시대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동 석탑은 현재 상륜부는 사라진 채 4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다.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탑동석탑을 ‘전형적인 신라계 이중기단을 사용하고 평박광대(平薄廣大)한 옥개석과 모서리 부분의 반전 등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자료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이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고 뛰어난 균형감과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고려 시대 석탑은 전반적으로 투박하고 두꺼운 느낌을 준다.

또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은 지붕돌받침의 수가 5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고려 시대 석탑은 3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디 이 탑은 두 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말하자면 쌍탑 형식인데 이러한 쌍탑식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사지에서 처음 발생하여 망덕사지, 보문사지 등에서는 목탑으로, 감은사지, 천군동사지, 불국사 등에서는 석탑으로 나타나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서 이러한 쌍탑식 가람배치가 성행하게 된다.

사찰 안의 탑은 금당과 그 밖의 여러 부속 건물들과 어우러져 전체를 이룬다. 이러한 가람의 배치는 탑과 금당의 관계에 따라 1탑 3금당식,1탑 1금당식, 쌍탑식 등으로 나뉜다. 1탑 금당식 가람배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주로 고구려의 사찰에서 그 형식을 찾아 볼 수 있다. 배치 형태를 살펴보면, 탑을 한가운데 두고 북쪽으로 금당이 있고 동서에도 2개의 금당이 있어 탑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품(品)’자 형식이다.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는 남북축선상에 탑과 금당을 하나씩 두는 형태와 동서로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가 있다. 백제시대의 탑은 남북축선상에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로 군수리사지,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의 절터가 모두 이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무기교의 기교가 주는 아름다움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을 익산 미륵사지와 부여 정림사지 탑으로 볼만큼 백제의 석탑 조형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런 점에서 이곳 탑동마을 석탑은 백제계의 영향권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제계 석탑은 화강암을 주로 사용한 반면 신라계는 화강암과 검은빛깔이 도는 안산암(安山岩)을 섞어 썼다. 평박광대한 옥개석은 전형적인 백제계의 석탑 양식이다. 탑동마을 석탑은 고려 혜종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할 뿐 정확한 연대를 알 길이 없다.

고려 충숙왕 때 창건됐다고 전하는 덕룡사는 후대의 일로 이 탑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인다. 통일신라의 가람배치를 계승한 고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교가 융성했고, 따라서 개국과 더불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조성됐다. 초기에는 탑에 대한 배려가 높았으나 후기로 오면서 탑이 없는 절도 생겨난다. 고려의 가람배치는 산지일탑일금당병렬식(山地一塔一金堂竝列式)과 산지쌍탑병렬식(山地雙塔竝列式), 산지무탑식(山地無塔式)이 혼재한다.

탑동마을 석탑은 고졸한 모습이다. 무기교의 기교라고나 할까. 해체와 복원이라는 어수선함 속에서 왠지 모르게 엉성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온전치 못한 모습이어서 평가절하 된 면도 없지 않다. 어쨌거나 천년 세월을 견뎌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탑이 갖는 가치는 충분하다. 이곳 석탑은 마을의 중심을 잡아주는 신앙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밀반출에 얽힌 이야기도 어쩌면 신성시돼 온 탑의 존재를 후대에 알리려는 하나의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말 없는 것과의 대화는 구전되는 설화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먼 옛날 달 밝은 보름밤에 선남선녀들이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을 탑에게서 천 년의 그 간절함이 전해지는 듯, 유난히 늦은 을미년 정월의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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