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인은 겉보기엔 장애가 나타나지 않다보니 덜 불편할거란 오해가 있어요. 하지만 사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다보니 사소한 일조차 제약이 많습니다”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지만, 내 생각을 온전히 전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없는 삶은 어떤 삶일까. 전남농아인협회 해남군지부 정철하(47)지회장은 선천적인 농아인으로 태어나 지금껏 세상의 소리를 듣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마산 호교리 출신인 정 회장은 6남매의 막내다. 유독 정 회장만 선천적 청각언어 장애를 가진 채 세상에 태어났다. 선천적인 장애였기에 자신이 농아인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온 몸으로 느껴지는 차별과 불편함이 장애인임을 확인시켜줬다.

수화를 배우지 못한 어릴 적, 손짓 발짓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자연수화로 의사소통을 하다보니 평범한 아이들처럼 부모님과의 유착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어렸던 형제들도 정 회장을 만나면 모른 척 하거나 수화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정 회장은 아이들의 놀림을 홀로 헤치며 자라야 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일반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시험을 칠 때마다 점수는 0점, 높아봐야 10점이었다. 단어를 습득하는 것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고, 설명을 듣지 못해 수업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4학년에 학교를 그만뒀다. 다행히 13살이 되던 해 목포의 맹아학교 농아인부에 입학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제대로 수화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농아인 학교 입학 전까지도 수화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곳을 만나면서 비로소 의사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중퇴해야 했다. 입학이 늦어 고1을 마치자 23살이 돼서다.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형을 따라 서울 가방공장에 첫 취직을 했다.

설명을 듣고 기술을 배울 수는 없었지만, 건청인들이 하는 걸 눈여겨보고 점심시간에 혼자 연습하며 익혔다. 의사소통이 불편한 대신 눈치가 빨라지기 때문이란다. 건청인들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일할 수 있었고, 급여에서도 차별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화할 상대가 없는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TV에서는 수화통역 서비스를 해주지 않아 화면만 보고 있어야 했고, 다함께 술을 마시러 갔을 때는 홀로 잠을 청했다. 정신적인 고통은 커져만 갔다. 일요일에 농아인 교회를 찾아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의사전달 어려워 고립되는 농아인의 삶
수화·필담으로 함께 소통하는 사회 되길

광주·목포 등에서 건설현장, 축산업, 공장 등 가리지 않고 일하다 29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해남으로 돌아왔다. 해남엔 여전히 농아인을 위한 시설이 없었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 내줄 사람도 없었다.

지난 2004년 정 회장은 전남농아인협회 해남군지부를 설립해 농아인 권익향상에 뛰어들었다. 건청인들 속에서 극소수로 살아가는 농아인들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다.

농아인들과 함께 병원을 찾고, 읍면사무소에 서류를 떼는 등 열심히 봉사했지만 혼자서는 모든 농아인을 챙기기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화통역센터의 필요성을 꾸준히 건의했고, 지난 2008년 해남군 수화통역센터가 개소됐다.

군은 지난 2009년에는 읍면사무소와 병원 등에 23대의 화상전화기를 설치해 센터를 방문하지 않고도 통역을 의뢰할 수 있는 지원까지 해줬다. 늘어나는 지원만큼 수화교육을 배우러 오는 사람도 많아지는 게 작은 바람이란다.

지원은 늘어났지만 차별은 아직도 남아있다. 자막 방송은 일부 프로그램만 진행되고, 뉴스 통역도 하루 두 번이 고작이다. 장애인의 날 행사조차 공연 내용이 대부분 노래로 구성돼 농아인이 소외되고 있다. 수화노래공연을 넣는다면 농아인도, 다른 장애인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가 될 텐데 섬세한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게 아쉽단다.

또 장애인 의무고용제도가 실행되고 있어도 농아인 고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도 문제다. 지체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 고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해남은 1~6급 청각언어장애인이 820명이며, 그 중 1~3급의 중증 농아인은 300명가량 된다. 농아인협회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100여명인 점을 감안하면 아직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아인들이 있는 상황이다.

해남의 농아인들은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일정도로 삶의 질이 떨어진다. 영농조합법인에 취업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농번기 인력일을 다니는 정도다. 농아인은 의사소통이 불편할 뿐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투자해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힌다면 자립이 가능할거라 생각한단다.

정 회장이 농아인으로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때다.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두고 있는 정 회장은 자라나는 아이들과의 소통이 부족하고 학습을 도와줄 수 없어 늘 안타까운 마음이다.

“귀로 듣지 못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우리는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습니다. 또 다른 언어인 수화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수화가 없더라도 부족하나마 필담을 할 수 있는데, 농아인이라는 걸 알고 난 후 의사소통이 안 될거라 단정 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조금 다르고 불편할 뿐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정 회장은 최근 한 가지 꿈이 생겼다. 농아인 전용 요양원을 설립하는 것이다. 수많은 요양원이 생기고 있지만, 농아 노인이 일반 요양원에 들어가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 외로운 노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란다.

농아인은 전화라는 사소한 수단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 지금은 영상통화가 나와 한결 수월해졌지만 그 이전에는 팩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큰 축복이라는 걸 인식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정 회장처럼 농아인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월숙 수화통역사의 통역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