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택 그가 지금 뇌출혈 후유증으로 많이 아프다.



‘영등포의 밤’으로 1962년 데뷔, ‘고향무정’ ‘아빠의 청춘’ ‘충청도 아줌마’...줄줄이 히트
지금은 서울 요양병원에서 뇌출혈 후유증으로 투병중

‘오기택 가요제’가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았다. 매혹적인 중저음의 창법으로 60,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오기택(75). 1962년 ‘영등포의 밤’으로 데뷔해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 ‘아빠의 청춘’ 등 우리 가요사에 숱한 히트곡을 남긴 오기택. 이번 가요제를 맞아 그의 파란만장한 50년 노래인생을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오기택.
그가 지금 많이 아프다. 뇌출혈 후유증 때문이다. 지난 1996년 연말연시를 맞아 찾은 제주 추자도 옆 무인도인 염섬. 이곳에서 오기택은 홀로 바다낚시를 하다가 쓰러져 죽음의 공포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 극한의 고통속에서 꼬박 이틀 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됐으나 그 후유증은 가혹했다. 왼쪽 다리와 팔에 마비가 온 것. 재활치료를 통한 재기의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휠체어에 의지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거동이 가능한 상태다.

“오랜만에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요양병원에 계시다고 하네요.” 오기택이 사는 여의도에서 최근 2년 동안 아파트를 방문해 복지센터를 오가며 그를 돌봤던 사회복지사 정명섭(53)씨의 전언이다.

“몸이 안좋으셔서 원체 외부에 노출되는 걸 꺼리셨는데 지금은 연락하는 것도 쉽지가 않네요. 찾아뵙겠다고 해도 천호동이라는 말씀밖에는 안하시니...”

오기택은 지난 1962년 데뷔곡 ‘영등포의 밤’을 히트시키며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이후 타고난 가창력과 매혹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곡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당대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방송가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으면서 서서히 세인들의 관심속에서 멀어져간다. 또 볼링,골프와 같은 스포츠에 깊이 빠져들면서 가수생활마저 소홀히 한다. 이것은 그가 지금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이다. 유언과도 같았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다. “술 조금 마시고. 너는 목소리가 좋으니 딴생각 말고 노래나 잘부르도록 해라.”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오기택에게 어머니는 그야말로 인생의 전부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셨다. 그 때문인지 그는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아왔다. “그 때 어머니 말씀만 들었어도...”

1939년(호적상으로는 1943년) 4월 2일 해남군 북일면 월성리에서 태어난 오기택은 북일 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거쳐 서울 성동기계공고를 졸업했다. 외삼촌의 권유로 이뤄진 서울 유학이었다. 고교 졸업후 회현동 동화백화점(현재는 신세계백화점)에 있던 동화예술학원을 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오기택은 1961년 KBS가 주최한 제1회 직장인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한 것이 가요계에 얼굴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당시 TV로 오기택이 노래하는 모습을 본 작곡가 김부해가 보름간 그를 수소문한다. 연락을 받고 충무로에 있던 가요작가동지회 사무실을 찾아가 보니 김부해와 반야월, 조춘형, 박시춘 등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작곡가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를 본 김부해가 “노래 한 번 불러봐라”했고. 오기택은 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렀다. 노래를 끝내자 김부해는 노래를 잘한다며 내일 다시 오라고 한다. 다음날 다시 찾아갔더니 신곡 악보들을 내밀었다. ‘영등포의 밤’, ‘가버린 영아’, ‘키스 키스 키스’ 등 모두 김부해가 직접 작곡한 곡들이었다. 몇 달 동안 연습을 하고 김부해의 주선으로 신세기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해서. 1962년 12월 ‘영등포의 밤’이 담긴 데뷔 음반이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기세를 꺾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신세기레코드사는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영등포의 밤’의 히트로 회사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4년 전에는 영등포구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영등포의 밤’ 노래비를 세워줬다.


‘영등포의 밤’으로 스타덤에 올랐을 때인 1963년 4월 오기택은 해병대에 자원입대해서 65년 가을 만기 제대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고향무정’이 대히트를 기록한다. 함께 취입한 ‘충청도 아줌마’와 함께 서영은의 곡인 ‘고향무정’의 반응은 ‘영등포의 밤’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하면 ‘고향무정’이 흘러나왔고 전파사와 레코드가게 등 서울 시내 가는 곳마다 그 노래를 틀어대기 바빴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오기택에게 위기가 닥친다. ‘고향무정’이 히트를 치고 있을 때 그는 볼링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배우 신영균이 운영하던 명동 신스볼링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느라 방송 출연을 소홀히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볼링을 하러 워커힐호텔에도 자주 다녔다. 하루는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고향무정’을 튼 다음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오기택이 노름에 미쳐 워커힐 카지노에서 산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바람에 난리가 났다. 이 말을 들은 오기택은 담당 PD에게 달려가 멱살잡이를 하며 거세게 항의한다. 이 사건이후 서울의 모든 방송국들이 오기택의 노래는 전혀 틀지 않았다. 일종의 괘씸죄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사람을 노름꾼으로 몬 것은 너무 억울했다. 그 때부터 그는 가수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

방송 출연은 중단했지만 음반취입은 계속했다. 한 달에 무려 20곡씩 몇 년 동안 계속 취입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악단과 가수가 동시 녹음을 했으니 40여 명 중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녹음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런데도 취입곡이 1천곡을 넘는다. 나중에는 길을 가다가 낯선 노래가 나오는데 목소리가 익숙해 자세히 들어보면 자신이 부른 노래인 경우도 있었다.

가수활동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오기택은 1979년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가수들의 방송출연료를 대폭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때까지 가수들의 등급이 6등급이었는데 경력에 따라 ABC의 3등급으로 줄이고 특A 등급을 신설했다. 출연료 인상률이 무려 150%였다. 목표를 관철시키려 가수들의 방송 출연을 중단시키는 등 저돌적으로 매달리며 싸운 결과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오기택은 방송과 점점 더 멀어져갔다.

오기택은 가수 경력 못지않게 골프 경력도 상당하다
1980년 처음 입문한 이후 골프의 매력에 빠져 숱한 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다. 심지어는 69회부터 71회까지 전국체전에 전남 대표로 나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등 메달을 4개나 받기도 했다. 골프를 잘하니 프로 골퍼로 데뷔하라는 권유도 수없이 받았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골프를 하느라 가수생활을 소홀히 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는 오기택. 결혼 안하고 독신으로 산 것과 어머니에게 불효한 것과 더불어 평생의 후회로 남는단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세대는 얼마 없다. 그러나 그의 이름 석 자는 몰라도 ‘이 세상에 부모마음 다같은 마음...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청춘’과 같은 주옥같은 그의 노래는 세대를 넘어 사랑받고 있다. 그의 노래가 이토록 세대공감을 이끌어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는 원곡주의자다. “저음이나 고음에 감정을 담기가 쉽지 않은데 목소리 자체에 감정이 담겨있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 악보에 없는 감정까지 들을 수 있다. 정말 대단한 가수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고향을 위해 사람노릇도 제대로 못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요제를 열어주니 그저 송구스럽고 고마울 뿐이라는 그의 바람은 마지막으로 고향을 노래하는 것이다.

“‘영등포의 밤’이나 ‘충청도 아줌마’와 같은 노래를 불렀으면서 정작 고향인 해남을 노래한 것은 없어 아쉽네요. 그나마 ‘고향무정’이 고향노래라면 노래랄까.”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올가을 그가 다시 고향 해남에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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