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는 말이 있어요. 한 순간에 눈앞의 세상이 모두 캄캄하게 변해버리니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세상을 청각, 촉각, 후각에 의지해야 느낄 수 있어요. 흰 지팡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된겁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해남지회 김덕모(69)지회장은 어릴 적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던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송지 금강리에서 5남매의 막내 외동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여느 아이들처럼 뛰어놀기 좋아한 장난꾸러기였다.

공부하기 위해 목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중 17살부터 눈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이 가렵고 따끔따끔한 증세가 시작되더니 곧이어 빨갛게 충혈되고 시야가 좁아진 것이다.

목포 안과에서 치료하다 차도가 보이질 않자 광주·서울·부산 등 전국 각지의 좋다는 병원을 쫓아다니며 치료에 매진했다. 금세 나을거라 생각했던 눈의 상태는 나빠지기만 했고, 김 회장과 어머니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력은 계속 떨어졌다. 결국 21살이 되던 해 완전히 실명에 이르렀다. 유전성 병도 아니었고, 집안에 실명한 사람도 없어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5남매를 키워온 김 회장의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통곡할 노릇이었다.

김 회장은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곁에서 살았다. 처음엔 집 안의 가구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여기저기 부딪히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농사지으러 밖에 나가면 화장실 찾기가 힘들어 문에 줄을 매달았을 정도였다.

방향감각이 없다보니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고, 밥을 먹을 때에도 식기판을 사용해야 했다. 반찬그릇을 따로 놓으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불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활 속 사소하고 당연한 일들이 넘기 힘든 벽으로 다가왔다.

김 회장에게 그 시절은 죽지 못해 사는 날들이었다. 볼 수 없으니 나갈 수도 없었고, 일을 하지도 못했다. 한창 꽃필 나이에 새카만 세상으로 떨어졌다는 생각에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번씩이나 죽음을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죽지 못한 이상 살 수밖에 없었고, 김 회장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마지못해 생을 이어가고 있던 28살. 내사리로 이사오면서 김 회장의 인생을 검은색에서 핑크색으로 바꾼 사람을 만나게 됐다. 아내 김숙자(63)씨를 알게 된 것이다.

아내 김 씨는 우연히 김 회장을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빠졌다. 김회장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과 성격 모든 것이 김 씨의 마음에 흘러들어와 먼저 손을 내밀게 됐단다.

22살 꽃다운 아가씨였던 김 씨는 현실적인 여건을 고민하지 않고 김 회장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을 했었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김 회장을 택했고, 농사를 지으며 두 아들을 낳아 길러냈다.

그런 아내가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김 회장 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수줍게 웃는다. 아내 김 씨는 오히려 내가 더 사랑해 쫓아다녔다며 당당히 말한다. 지금까지도 알콩달콩 서로를 의지하며 평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하고 있다.

갑작스런 실명, 아내 도움으로 극복
시각장애인들의 삶의 질 향상시켜야

김 회장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준 아내 덕분에 김 회장은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던 바깥 외출도 자주 할 수 있게 됐다. 해남은 시각장애인들이 혼자서 밖을 나설 수 있을만한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행로에 점자블럭 등이 설치돼 있지만, 보행로로 진입하는 턱이 울퉁불퉁해 작은 턱에도 발이 걸리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위험요소다. 교차로나 건널목 등에 음향 신호기 설치가 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실질적으로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도 없다. 이 때문에 해남의 시각장애인들은 모두 활동보조인과 함께 밖을 나선다.

또 엘리베이터 등에 점자로 안내표시가 된 곳들도 있지만, 해남에서는 점자를 제대로 알고 있는 시각장애인의 수가 적다. 나이든 노인 장애인이 많다보니 배우는 걸 회피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 매주 점자 강의를 하고 있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사람은 6명뿐이다.

해남에 있는 시각장애인 수는 1급~6급을 모두 합쳐 1000여명이다. 그 중 시각장애협회 회원은 300명이고, 협회에 자주 나오는 회원들은 70~80명이다. 밖에 나오기 힘든 시각장애인의 특성상 도움이 꼭 필요한데, 인력이 빠듯하다보니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문화적인 삶의 질이 떨어지는데다 경제적으로도 어렵다. 해남에서 시각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안마사뿐이기 때문에 대부분 보조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시각장애협회에서 일반인 안마사를 꺼리는 건 시각장애인을 위한 별다른 일자리가 없어서예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제약이 많아요. 지금 상태로는 안마사가 거의 유일한 일자리니까요. 폐지조차 주울 수 없어요”

단순 소포장은 가능하지만 해남에서 일자리를 얻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대부분의 사업체에서 소포장 자동화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어 속도가 더딘 시각장애인들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 장애인 사업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김 회장은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름을 가진 동등한 사람으로 봐줬으면 한단다.

“사소한 차이들이 일상생활의 간극을 만드는 게 시각장애인의 삶이죠. 컴퓨터를 사용하려고 해도 좌판을 전부 외워야 음성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고, 길을 물을 때도 정확히 구체적인 방향을 말해줘야 알 수 있어요. 군민들이 다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1980년 10월 15일은 흰 지팡이의 날이 제정된 해로, 흰 지팡이는 시각 장애인이라는 표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가 보는 세상을 누군가에게 살짝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