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자 때마침 불어나는 냇물에 갇혀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태우던 조선의 한 휴머니스트가 생각났다. 그래서 두륜산 곳곳에 그리움의 화신처럼 피어나는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의 발자취를 찾았다. 두륜산에 가면 초의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하다. 가련봉이 그렇고, 만일재가 그렇고, 정상에서 맞이하는 저 먼 바다와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들려주는 소근거림이 그렇다. 두륜산 곳곳에 아직 초의의 숨결이 살아있고, 이곳에서 만나는 자연의 모든 물색은 언제나 신선하다.

두륜산 꿈길 따라 그리움이 ‘물씬’

북일 삼성마을 지나 안개 낀 아침 비탈길을 걸으면 이야기 속 선비들의 환영이 물밀듯 밀려온다. 솜털 같은 찻잎 돋아난 밭고랑 사이로 걸음을 재촉하면 키 큰 물푸레나무 허연 속살 하늘빛에 걸려 살랑대는 울창한 숲이 시작되고 쓸쓸한 계절의 흔적들이 발밑에서 서걱거리면 어디선가 아련히 들리는 소리 있어 귓가에 맴돈다. “공명(功名)이 부운(浮雲)인줄 알건만 세상 꿈 깬 이 없으니 슬프구나”  입버릇처럼 되뇌이며 산길을 걷는다.

<사진1> ‘연꽃 봉우리’란 이름의 가련봉에 올라 초의는 추사와 다산을 그리워하며 매일 같이 편지와 시를 썼다고 전한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야했던 조선의 프로페셔널. 스승과 벗을 만나려 수없이 오르내렸을 오솔길에 풀꽃들이 스쳐가는 바람으로 속삭이면 이 길 끄트머리엔 우뚝 솟은 바위  하나가 노승의 주름진 얼굴이 되어 먼데 남해바다를 그리움에 젖어 바라보고 있다. 초의는 40여년 일지암에 기거하면서 많은 인연을 낳았고, 매일같이 가련봉에 올라 제주도를 향해 유배 떠난 벗(추사)을 걱정하며 아낌없는 마음을 담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스승(다산)을 그리워하며 쓴 글들이 가슴 절절한 감동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내가 자하동을 좋아하는 것은/ 거기 화초와 함께 어르신(茶山)이 계신 때문인데/ 마침 장마철이 되어서 가지 못하도다/ 행장을 꾸려 놓은 지 스무 날이 지났고/ 어르신께서 간곡히 불러 주셨는데/ 이 지경이니 뭐라 변명할 것인가/ 한밤에 별과 달이 사뭇 빛나고/ 머물던 먹구름이 새벽 되자 흩어지네/ 너무나 기뻐 주장자 짚고 일어나 보니/ 물색들 정녕 신선하구나/ 장삼자락 걷어잡고 시냇물 건너고/ 머리 숙여 대나무 숲도 뚫고 지났다/ 가까스로 만폭교에 다다르니/ 하늘색 갑자기 찌푸려지는데/ 골짜기 바람에 나무는 휘청이고/ 그 기운 벼랑 깊이까지 미치는구나/ 바람 불고 물방울 수면을 튀어 솟구친다/ 그만 중도에서 돌아오고 말았으니/ 서글픈 심사 토로하기 어렵구나/ 열흘이 지나도록 이 지경이니/ 슬프다 칠 척의 이 한 몸뚱이여/ 가벼이 날고자 해도 방법이 없네> - 阻雨未往茶山草堂(비에 갇혀 다산초당에 가지 못하고, 전문)

<사진2>  성하지절(盛夏之節), 자우홍련사와 일지암 마당에는 자미화(紫微花)가 붉게 피었다.

어느 해인가. 스승을 뵙고자 자하동(다산초당이 있던 곳) 가려던 길. 폭우 쓸린 냇물에 막혀 만폭교를 건너지 못하자 일지암 거처로 발길을 돌려야했던 노승의 상심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열흘이 지나도록 폭우는 계속되었고 스승처럼 받들었던 다산의 부르심에 결국 응할 수 없었다. 꿈길 같은 길 위에서 초의를 생각하니 사무치는 가슴으로 살았던 한 세상 허전함이 어디 그뿐 이었을까만, 불현듯 “슬프다, 일곱 자의 몸뚱이로 가벼이 날아올라 갈 수가 없구나” 노승의 탄식에 가슴이 저려온다. 모두가 떠나버린 남도 땅 어느 곳이나 한없이 적막하기만 하고 두륜산은 더없이 쓸쓸함뿐이니 세상어디에도 초의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벗을 향한 그리움 또한 근심처럼 늘어가고 먹먹한 가슴 참지 못해 숲을 헤치고 단숨에 달려온 산정에서 노승의 마음은 이내 한 마리 학이 되어 훨훨 날아올랐으리라.

초의차를 구걸하며 보낸 투정 섞인 벗(추사)의 서신에 또 어느 때였을까, 노승은 통쾌한 웃음으로 답신을 보냈지만 애써 감출 수 없는 측은한 마음 달래려 몸부림에 거닐었던 곳. 꿈 속 같은 길 위에서 선인들의 정담(情談) 소슬바람으로 머무르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산길을 오르내린다.

<사진3> 홍매, 자미화, 단풍, 동백 사계절 내내 일지암엔 그리움의 화신인 양 꽃들이 붉게 피어난다.

저 바다 끝으로 정(情)하나 떠나보내고, 거친 비바람 냇물에 휩쓸려 40리길 스승을 가슴에만 품었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까만 살다 살다가 그리움에 지쳐 힘들겠거든 이 길을 걸어보라! 두륜산 꿈길을 걷다보면 선인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슴마다 따스한 온기로 스며들지니, 이곳에 서서 하늘을 보면 선비의 기개는 아직도 푸르러 그 쩌렁했던 입담 눈앞에 선하다. 적막한 숲은 어느덧 산새가 주인이 되었고, 노승은 쓸쓸히 가섭봉(지금의 가련봉)에 앉아 기약 없이 떠난 벗을 그리며 아직도 긴긴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있다.
“초당의 청풍명월 나며들며 기다리는데, 먼 길 떠난 벗님은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그리움의 화신인 양 일지암 마당엔 꽃들이 붉게 피었다.
 

<작가노트>
초의는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과 교우하면서 조선의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일지암에 기거하면서 추사, 다산, 소치 등 많은 인연들을 만들었으며 조선의 차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물심양면 헌신하였다. 그의 모습은 여느 사찰의 제단이나 그를 기념하는 동상속에 갇혀있는 신격화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의 화신처럼 되살아나는 가장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사람, 장의순이었다. 두륜산 곳곳엔 아직도 초의의 숨결이 아련하다.

 

 

   
 
<사진가▪정지승>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 정지승님의 사진 속에는 우리의 문화유산 및 산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득하고 삶의 현장을 통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현재, 잡지와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