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이장경력을 지닌 옥천 월평리 김병채(51)이장. 지금은 농사일에 익숙한 농부이지만, 그는 한때 유조선 배를 타고 중동까지 다녔던 뱃사람이었다.

옥천중을 졸업한 후 광주 조대부고에 진학했던 김이장. 부산의 한국해양대를 입학하게 되면서 배를 타게 됐다. 원유를 수입하는 유조선 배를 타고 중동을 오가는 생활을 5년이나 했었단다.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부모님을 모시며 농사를 짓던 동생에게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교통사고였다. 김이장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지난 1997년 월평리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 어릴 적 부모님이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자랐지만 농사에서 손을 뗀 지 오래돼 농사일이 어렵기만 했다. 논에 물을 어떻게 대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농사일 배우길 1년,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농사일도 온전히 김이장의 몫이 됐다. 단감 3000평과 논 3000평의 농사. 농사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생긴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다. 막막함에 논에 나가 멍하니 서있던 때도 많았단다.

주민들에게 알음알음 물어가며 농사일을 배우고, 의지할 데가 없어 농업기술센터 수업을 들으며 배운 내용을 실천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지은 첫 해. 다행히 수확결과가 좋아 힘을 낼 수 있었다.

귀농한지 4년이 되자 농사일도 손에 익게 되고, 주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다. 주민들은 당시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인 그에게 이장을 권유했고, 부모님 같은 노인들을 위해 기꺼이 이장을 맡았다.

“월평리는 실 세대수 35가구, 주민수는 65명이에요. 그 중 65세 인구가 80%를 넘죠. 다들 농사짓는 분들인데, 연세가 있다 보니 좋은 제도가 있어도 신청을 못해요. 그러니 제가 중간에서 마을과 행정 사이에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이어드리고 있죠”

이장을 맡은 첫 해인 2001년, 직불금제가 시작되면서 신고식을 호되게 했다. 당시 주민들은 자신의 논이 어디에 몇 마지기 있다는 것만 인식했을 뿐 논에 대한 정확한 번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 면사무소를 드나들고, 주민들을 한 분씩 모시며 서류를 작성해나갔다. 꼬박 한 달이 걸린 작업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지하수를 먹던 마을에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고, 버스 승강장을 설치해 주민들의 불편을 덜었다. 구불구불하고 불편했던 도로 대신 마을 가운데에 2차선 도로도 냈다. 도로를 위해 논을 갈라야 했는데, 땅주인이 있는 여수까지 달려가 10일 걸려 설득을 했단다.

마을방송도 쉽지 않다. 마을이 세 군데로 나눠져 있어서다. 방송이 들리지 않는 6가구에는 일일이 전화를 드리고 있단다.

“마을에 독거노인도 9가구가 살아요. 기계조작을 잘 하지 못해 이장을 찾는 경우가 많죠. 버튼을 잘못 누르셨거나 전기코드를 꼽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대부분인데, 잘 모르시니 저에게 연락하더라고요”

그렇게 주민들을 챙긴 지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이장을 하지 않던 해에도 주민들이 김이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들과 부모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

주민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드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가끔 힘에 부치는 일도 생기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고 의연하게 일어선다. 주민들의 발이자 책임자인 그가 흔들리면 믿고 맡긴 주민들에게 면목이 없단다.

그가 마을일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하나가 된 마을’을 위해서다. 주민들이 서로 자신의 이웃을 챙기고 마음을 나눠야 살 길이 있다고 믿는단다.

“지금의 농촌 상황은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게 쉽지 않아요. 갈수록 농촌인구는 고령화되고 줄어들면서 단독가구도 늘어나겠죠. 그러니 함께 산다는 인식이 없으면 고생하는 건 주민들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공동체정신을 갖고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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