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면 용지리 임삼례(86)할머니는 신기리 삼남매의 둘째딸이었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 친정어머니가 임할머니 위로 낳았던 자녀 6명 중 5명을 떠나보내 둘째딸이 됐다. 동생도 한 명 떠나보냈다고 하니 3남매는 원래 9남매였던 셈이다.

임할머니는 7자매의 어머니다. 부모가 되고나서 돌아보니 친정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이 이해가 되지만, 그 시절에는 낳은 아이들 중 몇 명을 먼저 떠나보내는 게 흔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나물을 캐 무치고, 무순을 다듬어 먹기도 했다. 살림살이는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행복한 시간이었다. 바느질에 솜씨가 있어 이웃들 두루마기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할 수 없던 때다.

학교에 갈 형편이 안 돼 야학을 다니며 ‘포로시 한글만’ 익혔다. 야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니 다행이다 싶어도, 책을 펼치면 거북이 기어가듯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는 게 지금도 못내 아쉽다.

열아홉이 되던 해, 시어머니가 중매쟁이와 함께 임할머니를 보러 왔다. 샘에 물 길러 간 모습을 봤던 모양이다.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셨지만 금세 날을 잡았다. 중매쟁이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모양이다 싶었단다. 신랑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 서로 만나서 사귀어보고 결혼한다지만 임할머니 젊었을 적에는 구혼식 전까지는 얼굴도 모른 채 결혼했기 때문이다.

날을 급하게 잡아 결혼식날 잡기 위해 키운 돼지의 몸집이 너무 작았다. 호박을 주면 잘 자란다기에 호박을 익혀 주었는데, 다음날 돼지우리에 가보니 쭉 뻗어있는 채로 죽어있었다. 아마도 뜨거운 호박을 그대로 삼키다 하늘나라로 간 것 같았다.

돼지가 죽어버려 아버지는 상어를 사오셨다. 껍질을 벗기기 위해 뜨거운 물을 끓였다. 그러던 중 무담시도 기르던 개가 발에 뛰어들어 채이더니 뜨거운 물에 배를 크게 데였다. 결혼을 앞둔 때라 이상하다 싶었지만 예정대로 진행했다.

울퉁불퉁 고개를 넘고 20리를 걸어 남편을 만나러 가던 때, 심장이 시큰시큰하니 긴장됐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남편의 모습을 그때서야 처음 봤다. 그래도 살아보니 나름대로 부부 사이는 좋았던 것 같단다.

21살이 되어 첫째딸을 낳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다. 그렇게 갓난쟁이를 어르고 달래다 보니 어느덧 일 년이 훌쩍 지났다.

22살이 됐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고, 유격대와 순경들의 싸움이 잦았다. 한 날은 유격대가 친정 신기리에서 ‘순경질’ 좀 했다는 집안을 불태우고 다녔단다. 순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 친정이었지만, 지척의 이웃이 불 끄는 걸 도와달라는 말에 순박한 어머니는 열심히 도왔다고 한다.

그런데 불을 지르고 간 유격대가 돌아와 불 끄는 사람들을 잡아갔다. 관련이 있는 줄 알았던 거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물을 긷다가 몸을 숨겼지만 친정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말하길 친정어머니는 끌려가면서 “내 자슥들 어째야쓸꼬, 내 자슥들 어째야쓸꼬….”라고 말하셨다 한다. 유격대는 총도 없었고 곡괭이나 대창을 들고 다녔다. 그것들에 찔려서 돌아가신거다. 그 때 어머니 나이 57세. 남동생은 아직 11살이었다.

같은 면에 살았지만 워낙 세상이 흉흉해 갓난쟁이 아이를 업고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음력 9월 스무이렛날 돌아가셨지만 동짓달이 됐을 때나 갈 수 있었다. 설마설마 했었다. 하지만 이웃들이 날 보고 혀를 끌끌 찰 때 실감했다. 친정어머니가 정말로 돌아가셨구나 라고.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 첫째딸을 낳은 지 3년 후 둘째딸을 낳았다. 이상하게도 39살에 낳은 7째 늦둥이까지 나이터울이 꼭 3년씩이다. 아들을 낳고 싶었지만 잘 안 됐다.

넷째까지 딸이었을 땐 남편은 일을 보러 나가고 저녁에서야 나 혼자 아이를 낳았다. 탯줄도 직접 잘랐다. 혼자 물에 밥을 말아 눈물과 함께 삼키고 있으려니, 이웃에게 소식을 듣고 온 시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혼자 애 낳고 혼자 밥 먹고 있느냐고. 지금 생각하면 고된 시집살이는 모르고 지냈다.

임할머니가 막둥이를 낳고 돌이 되던 해,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심장병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들을 남겨놓고 먼저 떠난 것이 야속할 틈도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더 열심히 농사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셋째딸까지 여의고 나니 아이들이 다 컸다고 동생들을 도와줘 조금 더 수월했다. 보석 같은 막둥이까지 다 여의고 나니 어느덧 환갑이 넘은 나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초가집에서부터 차근차근 넓혀온 집에 혼자 산지 25년이 됐다.

일흔이 넘어가니 등뼈가 내려앉고,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 신세도 여러 번 졌다. 서울 사는 딸네 집에 잠깐 살았지만 왠지 어색했다. 딸내미야 말할 것도 없고 사위도 지극정성으로 잘 대해줬지만, 해남집이 가장 편했다.

혈압에 온 몸 마디가 무너져 내려도
외로워질 틈 없이 일 다녀

지금도 몸은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도 새벽 6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일어나면 아침도 거르고 혈압약만 먹은 채 집 주변에 만들어놓은 텃밭으로 나선다.

콩도 심고 깨도 심고. 고추며 가지, 민들레, 쑥갓까지 조금씩 다양하게 심었다. 풀 메고 하는 일이 지앙스럽기도 하지만 조금씩 소일거리 하며 몸을 움직이는 게 살아있는 느낌이다. 텃밭을 해서 돈을 벌수는 없지만 한 몸 챙길 수 있는 반찬 정도는 길러낼 수 있다. 이번에는 마늘도 조금 심었는데 실하게 자라서 기분이 좋다.

텃밭에서 오전을 보내고 심심해지면 마을회관으로 간다. 점심을 집에서 먹고 갈 때도 있고, 회관에 가서 함께 해먹을 때도 있다.

다 노인들만 모여서 밥 해먹는 것도 일이지만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 나누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오늘은 텃밭에서 뭘 했는지, 밭에 뭐가 났는지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시골에선 별다른거 할 게 없다. 예전에는 장구교실에도 참여했는데 요즘은 몸이 좋지 않으니 힘에 부친다.

컴컴해진 저녁에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다. 요즘은 뉴스를 주로 본다. 예전에는 드라마도 많이 봤는데 지금은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한 번은 친한 할머니가 임할머니 집에서 며칠 함께 지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코피가 났다. 코피가 나면 흐르도록 둬야 하는데 그걸 꿀떡꿀떡 삼켰단다. 한참을 코피가 멎지 않아 임할머니는 ‘저 양반이 죽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꼬’ 싶어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아프면 자식들한테 전화를 해야겠지만 임할머니 집에서 가장 지척에 사는 딸이 영암이나 광주다. 몸 아프고 잘 모르는 노인들끼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돈을 번다고 밭으로 일하러 다니는 양반들도 있지만, 욕심 안 부리면 딸네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도 충분하다. 병원비가 혈압이며 무릎이며 아픈 곳이 많아 병원비가 많이 나가는게 걱정이지만 자식들이 아직까지 살뜰히 챙겨준다.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노인네들도 많이 봤다. 그 사람들도 일 다녀오면 몸이 아프다고 난리다. 하루 7만원 벌어도 약값이 더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외로워질 틈도 없이 일하다보니 이젠 무덤덤해졌다는 임할머니. 하지만 임할머니는 필자가 논의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 앞에 서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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