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저마다 사는 모습이 다르다. 언제나 넘치는 에너지로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를 쉬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서는 사람은 뒤로 물러선 사람이 답답할 것이고, 물러선 사람은 나서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둘 사이는 함께하면 서로 힘들어하기 십상이다. 간혹 환상의 궁합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사실 나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 숨이 막힌다. 그들의 말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고, 빵빵 터지는 웃음과 크고 억센 손짓 몸짓을 쫒아가기도 버겁다. 그 속에서 한 시간 남짓 지내고나면 몇 시간 노동을 하고 난 것처럼 진이 빠진다. 칩거에 가까운 일상을 사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요새 나를 자꾸 밖으로 불러내는 벗이 생겼다. 만나면 자꾸 수다스럽게 부산을 떨게 만드는 친구다. 바로 텃밭이다. 남편과 동행할 때도 있고 혼자서 갈 때도 있는데 언제나 텃밭 그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쉼 없이 말을 건넨다.
‘저런! 땅콩이 왜 안 크나 했더니 개미 가족이 집을 짓고 사시네.’
얄궂게도 땅콩 심은 자리마다 개미집이다. 땅콩을 먹이삼아 큰 집을 짓고 사는 중이다.
‘호박 모종도 죽더니 참외 모종도 죽었네. 퇴비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호박은 거름을 많이 주어야한다는 말에 과하게 주었던지 나중에 심은 참외 모종까지 시름시름 앓는다. 노란 꿀참외의 꿈은 날아간 것 같다.
‘언제쯤 보랏빛 예쁜 꽃을 피워줄래?’
옮겨 심은 도라지는 한 개도 죽는 일 없이 새 땅에 잘 적응하는 중이다. 잔뿌리 없이 뽑힌 게 많아 걱정했는데 물 맛난 고기처럼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나중에 들으니 먹다 남은 도라지를 옮겨 심어도 살아날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난 녀석이란다.
열을 지어 자라는 고추 모종. 아직 뿌리를 활착시키지 못했는지 옮겨 심을 때 모습 그대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물을 실어 나르고, 키를 키우고, 잎사귀를 틔우기 위해 부산할 것이다. 그래서 응원의 한 마디를 보낸다.
‘너무 애쓰지 마라. 너무 힘들게 애쓰지는 마라.’
“옥수수로 모를 심었네. 세 개 중에 가운데 것 뽑아다 옮겨 심어야 할 것 같아.”
남편의 신신당부에 비가 그치자 부리나케 옥수수 모종부터 옮겨 심는다. 콩 세 알. 한 알은 벌레가 먹고,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사람이 먹기 때문에 세 알씩 심는다는 말에 그렇게 했더니 너무 밀식이 되고 만 것이다.
‘니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괜히 미안해 또 속으로 말을 건넨다.
밀짚모자를 쓰고 앉아 농부 흉내를 내며 일없이 밭을 바라본다. 내가 심어놓은 것 말고도 밭에는 참 많은 것들이 살고 있다. 지렁이 개미는 물론이고 명아주 쑥 냉이 바랑이 같은 풀들도 무리지어 커간다.
‘너네 큰 일 났다. 서둘러 안 크면 저 녀석들에 치어 제대로 못 자라겠다.’
작물보다 풀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 쯤 알고 있다. 이제 내 호미질도 바빠질 것이다.
말 없는 중에 수많은 말이 오가는 텃밭에서 ‘평화로움’ 그 한 가운데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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