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마구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전국 시대도 거의 막을 내릴 무렵, 즉 진왕(秦王) 정(政:훗날의 시황제)이 천하를 통일하기 직전의 일이다.
당시 포학 무도한 진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 중에 형가(荊軻)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위(衛)나라 출신으로 독서와 검도를 좋아했다. 위나라 원군(元君)이 써주지 않자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연(燕)나라에서 축(筑: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를 만났다.
이 고점리는 비파의 명수였다.
술을 좋아하는 형가와 고점리는 곧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매일 저자에서 술을 마셨다. 취기가 돌면 고점리는 축을 연주하고 형가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감회가 복받치면 함께 엉엉 울었다.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傍若無人]'…….
그 후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으로 진의 시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죽었다.

백두여신(白頭如新)
머리가 파뿌리처럼 되기까지 교제하더라도 서로 마음이 안통하면 새로 사귀기 시작한 사람과 같다
추양(鄒陽)은 전한(前漢) 초기의 사람이다. 그는 양(梁)나라에서 무고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옥중에서 양나라의 왕에게 글월을 올려 사람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했다.
형가(荊軻)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의협심을 존경하여, 그를 위해 진(秦)나라 시황제를 암살하러 갔었다. 그러나 태자 단도 형가를 겁쟁이라고 의심한 일이 한 번 있었다.
또 변화(卞和)는 보옥의 원석을 발견하여 초나라 왕에게 바쳤는데, 왕이 신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을 기만하는 자라 하여 옥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발을 베는 형에 처했다.
이사(李斯)는 전력을 기울려 지나라 시황제를 위해 활동하고 진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나 마지막에 2세 황제로부터 극형에 처해졌다.
정말 백두여신(白頭如新) 말대로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제하더라도 서로 이해하지 못함은 새로 사귄 벗과 같다.
양나라 왕은 이 글을 읽고 감동하여 그를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상객으로 맞이해 후히 대접했다.

백안시(白眼視)
흰 눈으로 보다는 뜻으로, 남을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
위진 시대(魏晉時代 : 3세기 후반)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노장(老莊)의 철학에 심취하여 대나무숲 속에 은거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에 완적(阮籍)이 있었다.
완적은 여러 가지 책들을 널리 읽고, 술을 좋아했고, 거문고를 교묘하게 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예의 범절에 얽매인 지식인을 보면 속물이라 하여 '백안시'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 때 조문객들이 와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침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물끄러미 손님들을 응시하고, 조문객에 대한 예절인 곡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지만, 검은 눈동자와 흰자위로 외면하였다. 통속적인 예절을 지키는 선비를 만나면 흰 눈으로 흘겨보았다.
어느 날 역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형 혜희가 완적이 좋아하는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완적이 흰 눈으로 흘겨보며 업신여기고 상대해 주지 않자 혜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도망가듯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혜강이 술과 거문고를 들고 찾아가자, 완적은 크게 기뻐하며 검은 눈동자를 보이면서(靑眼視) 환영했다.
이처럼 상대가 친구의 형일지라도 완적은 그가 속세의 지식인인 이상 청안시(靑眼視)하지 않고 '백안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조야(朝野)의 지식인들은 완적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 몹시 미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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