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은 전기에만 해도 세습 호족들이 지배할 수 있었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외척과 환관들이 황제의 권력을 능가하는 일이 나타났다. 앞서 나타난 인물이 두씨였으며 나중의 순제 때에 나타난 인물이 양기(梁冀) 형제였다.
양기란 자는 건달이었다. 그의 누이가 황후가 되면서 그의 세도는 탄력이 붙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부친 양상(梁商)은 집금오, 양기는 양읍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상서령 좌웅의 간언에 의해 양기는 양읍후의 자리에서 사퇴하게 되었다.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 85장(丈)이나 땅이 벌어질 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순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고(李固)가 간언했다.
"이것은 정치가 문란함을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환관의 권한을 축소했다. 양상이 죽자 양기는 부친의 자리를 이어받아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부터 3년 후 서른 살의 나이로 순제가 죽자 두 살짜리 조카 유병을 즉위시켜 충제가 되었다. 그러나 충제 역시 다음 해에 죽으니 이번에는 여덟살 짜리 질제(質帝)를 즉위시켰다.
어느 때인가 문무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어린 황제는 한 마디 뱉었다.
'이 사람은 발호장군(跋扈將軍)이로구만."
여덟 살 배기 어린 황제의 눈에도 양기의 전횡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질제는 그 마을 한 탓에 독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복차지계(覆車之戒)
앞의 수레가 넘어져 엎어지는 것을 보고 뒷수레는 미리 경계하여 엎어지지 않도록 한다. 곧 앞사람을 거울 삼아 뒷사람은 실패하지 말라는 뜻이다.
前漢(전한) 초기의 名臣(명신) 賈誼(가의)는 대단한 수재로 어려서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하남 태수가 그를 눈여겨 보다가 발탁했는데 소문을 들은 중앙의 文帝(문제)가 서울로 끌어들여 가의가 20세 때 박사가 되게 했고, 1년만에 太中大夫(태중대부)로 파격적인 승진을 시켰다.
문제는 고조 劉邦(유방)의 서자이자 제2대 혜제의 동생으로 諸候(제후)로 있다가 황실 內紛(내분)의 와중에서 帝位(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세력있는 제후 중에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자도 있었다. 이를 의식한 문제는 젊은 가의에게 중책을 맡겨 국정을 쇄신코자 했다.
가의는 문제의 뜻에 따라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건의를 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도 있다.
"앞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은 뒷수레에 교훈이 된다(前車覆後車戒·전차복후차계)는 말이 있습니다.
저 옛날의 夏(하) 殷(은) 周(주)시대를 되돌아 보면 왜 잘 다스려졌던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옛날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聖人(성인)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과 같아서 오래 영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秦(진)나라가 일찍 망한 것을 우리는 눈 앞에 보았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까닭은 진나라가 펴온 정책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피하지 않으면 앞날이 암담합니다. 그러므로 앞수레의 엎어짐을 보고 국가의 큰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세움이 마땅합니다."
이런 말을 귀담아 듣고 나라를 다스린 문제는 중국 역사상 名皇帝(명황제)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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