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위호

돌을 범인 줄 알고 쏘았더니 돌에 화살이 꽂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하면 아니 될 일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광은 양가의 자제로서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궁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신체가 장대하고 원숭이처럼 팔이 길었다. 그가 활쏘기에 능한 것도 선천적인 것으로서, 그의 자손이나 남들이 아무리 궁술을 배워도 이광에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의 활 쏘는 법은 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수십보 이내라도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적이 쓰러졌다.
이처럼 그는 오로지 활쏘기를 낙으로 삼아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이광은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항상 그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음식은 병졸들과 같은 것을 먹었다. 이에 병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농서, 북지, 안문, 대군, 운중의 태수를 지냈는데, 어느 곳에서나 용감히 전투에 임하여 명성을 드높였다. 이광은 특히 흉노와의 싸움에서 남다른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흉노의 선우와의 싸움에서 많은 부하를 잃고 적에게 생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때 형리는 그를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판결을 내렸는데,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이광은 그후로 몇 년 동안이나 집에 은거하며 사냥을 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흉노가 다시 침입하여 요서군의 태수를 죽이고 한안국 장군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천자는 이광을 다시 불러들여 우북평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이광이 우북평군에 부임하자 흉노는 이 소식을 듣고 한나라의 '비장군'이라고 부르며 수년 동안 감히 우북평군을 침입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이광이 사냥하러 갔다가 풀 속의 돌을 호랑이로 보고 화살을 쏘았더니 명중하여 화살촉이 깊숙이 박혔는데(射石爲虎), 자세히 보니 돌이었다.

삼년불비 우불명 (三年不飛又不鳴)
춘추시대 초엽, 오패(五覇 )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초(楚)나라 장왕(莊王:B.C. 613∼591)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장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과인을 간하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오."
그 후 장왕은 3년간에 걸쳐 국정은 돌보지 않은 채 주색(酒色)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 오거(五擧)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諫言)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차마 직간(直諫)할 수가 없어 수수께끼로써 우회적으로 간하기로 했다.
"전하,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까 하나이다."
"어서 내보내시오."
"언덕 위에 큰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이 새는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사옵니다.
대체 이 새는 무슨 새이겠나이까?"
장왕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3년이나 날지 않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를 것이오. 또 3년이나 울지 않았지만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이제 그대의 뜻을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시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으나 장왕의 난행(亂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부 소종(蘇從)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전에 나아가 직간했다. 그러자 장왕은 꾸짖듯이 말했다.
"경은 포고문도 못 보았소?"
"예, 보았나이다. 하오나 신은 전하께오서 국정에 전념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 이 없겠나이다."
장왕은 그날부터 주색을 멀리하고 국정에 전념했다. 3년 동안 장왕이 주색을 가까이했던 것은 충신과 간신을 선별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다. 장왕은 국정에 임하자마자 간신을 비롯한 부정 부패 관리 등 수백 명에 이르는 반윤리적 공직자를 주살(誅殺)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등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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