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에게 쫓기던 왕건이 꿈을 꾸었다.
“지금 강을 건너 가거라.”
불어난 강물로 도강(渡江)의 고민에 빠진 왕건은 피로가 겹쳐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잠에서 깬 왕건은 꿈에 생생한 백발노인의 말이 생각나 나가보니 강물은 빠져 여울이 되어 있었다.

이에 무사하 강을 건넌 왕건 군은 견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해서 ‘꿈 몽(夢)’, ‘여울 탄(灘)’. ‘몽탄’이라는 땅 이름을 얻게 됐다.

그리고 견훤의 군대를 물리친 장소는 ‘파군교(破軍橋)’로 남았다.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왕건과 견훤. 이들과 관련한 이야기는 우리땅 곳곳에 남아있다. 거의 모든 이야기는 승자의 기록답게 왕건에게 유리하게 서술돼 있다.

몽탄처럼 ‘도하(渡河)와 관련한 이야기는 또 있다. 왕건이 견훤과의 안동전투를 위해 경기도 이천을 지날 때. 하천의 물이 범람해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 지방 호족들이 곤경에 처한 왕건의 군대를 도와 무사히 하천을 건넜고. 안동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후에 고려를 건국한 뒤 은혜를 잊지 않고 ‘이천(利川)’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이천은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나온 말로 ‘큰 내를 건너니 이로웠다“는 뜻이다. 그리고 큰 내는 복된 하천이라 하여 ’복하천(福河川)‘이 되었다.
이곳에 오니 수년 전 들렀던 경북 문경의 ‘토끼비리’ 잔도(棧道)가 생각이 난다.

왕건이 견훤과의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패해 쫒기던 중 문경에 이르러 도주로를 찾고 있을 때. 토끼가 산속길로 달아나는 걸 보고 따라가 보니 좁은 벼랑으로 길이 있었다.

영강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토끼비리 길은 참으로 가당찮은 길이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그대로 황천길과 만나기 십상인 이 길은 오랜 세월 민초들이 넘나든 이력을 말해주듯 바위가 닳고닳아 맨들맨들해졌으니. 가히 낙숫물로 바위를 뚫는 공력만큼이나 경이로운 것이었다.

토끼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탈출한 왕건의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사족이지만 몽탄에 파군교가 있다면 팔공산에는 거꾸로 왕건 군이 패한 고개인 ‘파군재’가 있다.
내가 몽탄을 즐겨 찾는 이유는 ‘느러지’마을을 가기 위함이었다.

 

근래 들어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고 소문이 난 느러지는 영산강 물길이 만들어 낸 비경이다. 영산강 8경 가운데 2경으로 인근 식영정(息影亭, 담양의 식영정과 이름이 같음)과 함께 ‘몽탄노적(夢灘蘆笛)’으로 불린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梨山里).
말복 끝인 주말. 몽탄을 다녀왔다.
“말복인디 복달임이나 하세.”
요즘은 갯장어인 ‘하모’철이라 많이들 찾지만 나는 웬일로 민물장어가 생각났다. 몽탄 명산리는 나주 구진포와 함께 장어로 유명했던 곳이다.

원조임을 강조하며 이제는 홀로 남아 명산장어의 맥을 잇고 있는 ‘명산장어집’은 무려 80년의 내력을 지닌 집이다.

몇 번을 갔어도 때를 놓쳐 가는 길에 그냥 지나쳤던 그 명산장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올해는 장어가 많이 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값이 생각보다 싸다. 이 집은 물량에 따라 장어값을 탄력적으로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느러지다. 느러지는 곡강(曲江)이 만들어낸 특이한 지형이다.

‘물돌이동’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다. 경북 안동 하회(河回)마을이 유명하나 우리나라 곳곳에 물돌이동이 산재한다. 예천 회룡포, 영주 무섬마을, 영월 서강 한반도 지형, 무주 앞섬마을, 임실 구담마을 등등...
몽탄 느러지를 보려면 강 건너 나주 동강으로 가야 한다.

 

명산리 장어집을 나와 곧장 몽탄대교를 건너면 ‘한반도 지형 전망대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영산강 자전거길과도 연결되는 길을 떠라 굽이굽이 가다보면 이내 전망대다.

그러고보면 언제부턴가 어지간한 관광지에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는 ‘한반도 신드롬’이 추가됐다.

내가 알기로는 1990년대 중반 영월 서강의 한반도를 꼭 빼닮은 지형이 유명세를 타면서 그러한 현상은 급속히 두드러졌다고 본다. 그러자 영월군은 기득권 차원에서인지. 아예 ‘한반도면’으로 지명마저 바꿨다.
몽탄 느러지에는 ‘표해록(漂海錄)’으로 유명한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와 그의 부친(崔澤) 묘가 있다.

최부는 145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뭍으로 나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 상륙해 베이징을 거쳐 반년 만에 돌아와 성종의 명을 받들어 표해록을 썼다.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의 ‘하멜 표류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힐만큼 중국은 물론 일본과 영미권에도 번역 소개된 명저다.
탐진최씨로 나주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에서 태어난 최부는 처가인 해남에서 살아 이곳과도 인연이 깊다.

최부의 스승은 사림의 영수였던 김종직이다. 이로 인해 무오사화 때 단천으로 유배를 갔고. 갑자사화 때 김굉필과 함께 끝내 죽임을 당했다.

 

본래 그의 무덤은 해남에 있었으나 1947년 후손들에 의해 이곳 느러지로 이장됐다. 그의 사후에 표해록을 간행한 미암 유희춘은 최부의 외손자다.

유희춘은 외가인 해남에서 나고 자랐다. 아호인 미암은 해남읍의 진산인 금강산 미암(眉巖, 눈썹바위)에서 따온 것이다. 최부의 금남이 나주의 옛 지명인 금성과 해남에서 한 자씩 취한 것처럼. 그리고 조손(祖孫)간인 이들은 해남 해촌사와 광주 무양서원에 나란히 배향됐다.
 

느러지 마을표지석 옆 정자에 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한가로운 오후의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은 어디 가고. 웬일로 온통 할머니들 뿐일까. 혹시 이곳 뒷구지나루에서 배 타고 떠난 뒤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표해록과 맞물린 망령된 생각은 배묏재를 넘어 식영정이 있는 강당마을을 지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장자(莊子)의 고사가 깃든 식영정 앞강의 풍경은 실로 안온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산강. 그 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풍경은 결코 풍경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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