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면 봉학리에 위치하고 있는 김남주시인 복원생가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체 게바라’라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대중에게 그를 각인시킨 시집의 제목이 섬뜩했다. 나의 칼 나의 피!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짐작한 대로 그에 대한 수사(修辭)는 강렬하다.
민족시인·전사(戰士)시인·혁명시인 등등…
이는 암울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살다간 시인을 기려 일컫는 최고의 찬사다. 한 시절 그와 가까웠던 소설가 황석영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남도의 동백꽃.
마치 삶이 젊음의 처참한 쇠락을 보여주듯, 깨끗하게 목이 딱 꺾여 온전한 꽃 한 송이로 떨어지는 동백을 닮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쓰러졌지만 패배하지 않았으며, 나의 무기는 부러지지 않았다. -오직 나의 가슴만 부서졌을 뿐.’ -하이네의 시, ‘잃어버린 아이’에서-
김남주는 생전에 하이네의 이 시구를 즐겨 암송했다. 해서 황석영은 김남주를, 한 겨울 눈 속에 피었다 선연한 핏빛으로 떨어지는 동백꽃으로 보았다.

해남의 시인들, 그리고 김남주와 고정희

내가 아는 해남 출신 시인으로는 김남주와 고정희, 이동주, 박성룡, 그리고 김준태와 황지우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이들 외에도 많은 시인들이 활발한 시작(詩作)활동을 하고 있지만 전국적인 지명도를 획득한 시인으로 아마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김남주와 고정희는 안타깝게도 불꽃같던 삶을 마감한지 오래고. 이들보다 윗 세대 시인으로 이동주와 박성룡이 있다. 김준태와 황지우는 아직도 문단에 중견으로 건재하다.
내가 김남주를 만난 것은 지난 2003년 여름.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였다. 그곳에서는 ‘민족시인 김남주 그 문학과 삶 전(展)'이 열리고 있었다.
생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전시회장을 둘러보자니. 옥중에서 우유팩 뒷면에 칫솔을 갈아 눌러썼다는 ‘茶山이여, 茶山이여’가. 또 단 하나의 혈육인 늦둥이 아들(토일)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시가 기억에 남는다.
김남주 역시 저항시인이기 이전에 탁월한 서정시인이었다. 무릇 진정한 시인이라면 불의에 분노하고 시대의 아픔을 피 끓는 절창(絶唱)으로 꽃피워내게 마련이다. 신동엽과 김지하가 그랬고. 김준태가 그러했듯이…
‘궁핍한 시대’의 많은 젊은 시인들. 더구나 전라도를 고향으로 가진 시인들은 하나같이 광주와 5월, 억압과 외세, 민중·민주와 같은 질곡의 시대를 괴로워하며 기꺼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김남주(삼산면 봉학리)와 이웃한 삼산면 송정리 출신인 고정희(高靜熙, 1948~1991)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와 비판을 힘찬 언어로 승화시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남도의 가락을 접목시킨 ‘초혼제’로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한 고정희의 시는 슬픔과 어둠을 말하면서도 좌절이나 절망, 혹은 한탄을 말하지 않는다.
김남주보다 두 살 아래지만 그의 시작에 영향을 끼친 김준태의 시는 고향인 화산면 대지리의 황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광주 5.18당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쓰면서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의 ‘보리밥’, ‘감꽃’, ‘참깨를 털면서’ 등 일련의 시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김남주의 표현대로 “야, 이런 시라면 나도 쓰겠는 걸”하며 절로 공감케 된다. 그만큼 평이한 시어(詩語) 속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풍자(諷刺)는 압권이다.

유홍준이 추억하는 김남주의 “좆 돼버렸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명지대 석좌교수)은 지난 6월. ‘가장 광주다운 사람’으로 김남주를 이야기했다.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였다. 그가 들려준 실화를 그대로 옮겨본다.
“광주일고를 나온 김남주 그 자식이 자기가 ‘해방둥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해방둥이일 수가 없다. 해방둥이가 멋있어서 해방둥이라고 하고 다녔다. 이 김남주가 가장 많이 쓴 문장이 ‘좆 돼버렸어’다.
남주가 ‘동물농장’에 나올 법한 친구들과 영화 ‘닥터 지바고’(1965년 개봉)를 보러 갔다. ‘닥터 지바고’에 소냐와 라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바고가 아주 고결하게 사는 것 같으면서 갑자기 라라하고의 베드신이 확 나온다고.
그래서 (주변에서) 한번 가보라고 해서 간 거다. 화면이 확 바뀌니까 김남주가 ‘얼레!’ 했다. 극장 안이 웃음바다가 됐다. 닥터 지바고 코에 고드름이 막 열리는데 ‘사랑의 테마’가 막 나오니까 김남주가 ‘좆 돼버렸네’ 했다가 극장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남주가 ‘남민전’ 한다고 하다가 징역 7년을 살았다. 그때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데, ‘한마디로 좆 돼버렸어야’라고 했다. 진짜다.”

김남주의 애창곡 ‘고향의 그림자’

김남주 시인은 생전에 남인수 노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불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구슬피 부른 노래엔 가슴 아픈 슬픔이 실려 있었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지리산 시인’으로 알려진 이원규의 김남주, 고정희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다.
1990년 초여름. 서울 압구정동에서 문학행사를 마치고 이원규는 김남주, 고정희와 함께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함께하던 많은 무리가 자리를 뜨고 이들 두 시인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오현숙 간사와 이원규 그렇게만 남았다는 것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늦은 시간 밤비 소리에 센티멘털해진 것일까. 먼저 김남주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향의 그림자’였다.
노랫말에서 두 사람 모두 고향을 떠올렸는지. 노래를 부르는 김남주나 노래를 듣는 고정희 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고정희는 바로 다음날 필리핀으로 1년동안 떠났다 돌아온다고 했다.
두 사람의 눈물과 특히 2절의 가사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버린 고향이길래’는 묘한 울림마저 주기에 충분했다. 이원규는 고향이 지척인 두 사람에게 혹시 남모르는 흠모의 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느껴질 정도였다.
이원규의 추억은 계속된다.
“마침내 고 시인이 답가를 하고, 다시 김 시인이 답가를 하는 등 무려 30여 곡이 번갈아 불려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래와 노래가 모두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냥 답가가 아니라 화답이었다. 오래 듣다보니 그제야 오랜 세월 동안 차마 말과 행동으로 하지 못한 내밀한 고백들을 노래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간사와 나는 자리를 피해줄 마음도 내지 못한 채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었다. 새벽 빗소리 속에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신적인 사랑의 진수를 엿본 셈이었다.”
그렇게 새벽에 헤어진 뒤 필리핀을 다녀온 고정희는 1991년 6월9일 그토록 사랑하던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해 유명을 달리하고, 김남주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1994년 2월13일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함성’ 발간과 남민전 가입

삼산면 봉학리에 김남주 생가가 있다. 김남주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곳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해남중을 졸업하고 광주제일고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 정책에 반발해 고교 2학년 때 자퇴를 한다. 1969년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그 해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한 김남주는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학생 운동에 앞장선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김남주는 친구인 이강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로 유신을 반대하는 신문인 ‘함성’을 발간한다. 그리고 1973년. 제호를 ‘고발’로 변경하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로인해 전남대에서 제적된 김남주는 8개월간 복역한 후 해남으로 귀향한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1974년 평론가 염무웅의 추천으로 ‘진혼가’와 ‘잿더미’를 비롯한 7편의 시를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해남과 광주를 오가며 농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활발히 주도한다.
1978년 수배를 피해 상경한 김남주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 그해 박광숙과 결혼을 한다.

석방 이후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남주는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를 출간한다. 감옥에서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 지은 시와 산문을 면회객들을 이용해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수년에 걸친 문인들의 구명 운동과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과 서한을 정부에 발송하였으나 전두환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과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198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마침내 9년 3개월 만에 석방된다.
1989년. 김남주는 10년 넘게 자신의 옥바라지를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어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을 맡는데 1992년 불의의 췌장암으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사퇴하게 된다.
김남주는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사면 복권이 되지만 오랜 수감에 따른 후유증과 과로로 췌장암이 악화돼 결국 1994년 2월 13일 삶을 마감한다.
향년 49세였다. 사후에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으며 2000년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안치환의 헌정 앨범 ‘Remember’가 발매됐고. 같은 해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가 제막됐다.
김남주는 519편의 시를 남겼다. 이 가운데 300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다. 그의 옥중 시는 80년대 현실 비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등을 비롯해 시선집 ‘사랑의 무기’, ‘저 창살에 햇살이1·2’, ‘꽃 속에 피가 흐른다’와 산문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등이 있으며, 제3회 윤상원문화상,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조선의 마음이여!

외모에서 느끼는 김남주의 첫인상은 고지식한 선생님이랄까. 도리에 어긋나는 일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결기가 느껴진다. 만약에 그가 민주혁명의 제일선에서 활약하지 않았다면 그의 전공대로 영어 선생님이 됐거나 가슴 따듯한 서정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찬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을 지나며’전문-
황석영은 “혁명과 투쟁, 사랑을 서정시에 부쳐 노래한 시인이며, 그의 시들은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동시처럼 맑기까지 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시대가 그를 민주화 투쟁의 전사 시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과연 그것 뿐이었을까. 그는 감나무 까치밥에서조차 조선의 마음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가슴은 한없이 따듯했고. 불의에 뜨겁게 타올랐다.
남도의 동백꽃.
김남주는 그렇게 살다 갔다.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