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연정리와 월호리가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를 ‘검덕굴(골)’이라 불렀다. 검덕굴이라니. ‘검(儉)’은 ‘검다’는 의미로 단군왕검에서와 같이 ‘우두머리’의 의미가 있다.
즉, ‘왕검(王儉)’의 ‘검’은 ‘검다’, ‘둘러싸다’에서 나온 ‘감(아래아(,)가 들어감)’이라는 말로 암흑을 상징하며 ‘웅(熊)’으로 상징되는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을 가졌다. 이처럼 단군신화는 환인(桓因)과 환웅(桓熊)이라는 ‘밝(아래아로 표기)신(광명신·光明神)’과 웅과 왕검이라는 ‘감(아래아 표기)신(지모신)’의 상반된 신개념이 공존한다.
또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장을 나타내는데 이로써 단군왕검은 제정일치사회의 우두머리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검단(黔丹)’이란 지명도 마찬가지 의미를 갖는다. 검은 ‘검다’의 차음(借音)인 것이다.
검덕굴이 있는 화산 연정리 석정마을에 그 옛날 지배계층이 살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규모 고인돌 군(群)이 있다. 좁은 공간에 무려 48기가 분포돼 있는 것이다. 이는 인근의 방축리 고인돌 군과 더불어 이 지역이 오래 전부터 해남 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고인돌,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대략 3만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전 세계 8만 개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이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1만9000여기가 전남지방에 분포한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따라서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 가운데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럽, 중국,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는 물론 보존가치가 높다.
고창은 2000년 지정 당시 고창읍 죽림리 및 도산리와 아산면 상갑리 및 봉덕리 일대 고인돌 등 447기, 화순고인돌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 고인돌 596기, 강화고인돌은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을 비롯한 70기 등 모두 820여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고창·화순 고인돌은 보존상태가 좋고 분포밀집도가, 그리고 강화고인돌은 형식이나 분포 위치 등에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높아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죽림리, 봉덕리, 상갑리 일대에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7기가 분포해 있다. 죽림리 고인돌은 해발 15~65m의 등고선을 따라 일정한 높이에 442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도산리 지동마을에도 고인돌 5기가 남아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1990년에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었으며 행정구역에 따라 상갑리·봉덕리, 죽림리, 도산리 3개 지역으로 나뉘고, 각 지역 내에 모여 있는 상태에 따라 상갑리·봉덕리는 4개 지구, 죽림리는 6개 지구로 구분된다.
고창 고인돌의 특징은 좁은 지역 안에서 440여기가 밀집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인돌의 형식은 탁자식·기반식(바둑판식)·개석식(뚜껑식)과 탁자식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이 있으며 채석장 유적도 발견됐다. 그러나 무덤방 안에서 부장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 군(사적 제391호)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96기(효산리 277기, 대신리 319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으며 고인돌에 쓰이는 돌을 캐기 위한 채석장도 발견됐다. 대신리에는 해발 65~125m, 효산리에는 해발 45~90m에 분포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인돌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숲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계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곳에는 100톤 이상의 대형 고인돌 수십 기를 비롯 좁은 지역 안에 고인돌이 밀집 분포한다.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돼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과 축조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고인돌 군(사적 제410호), 화순 벽송리 고인돌 군(전남도기념물 제124호)
#강화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들이 분포해 있다. 표고 280m의 높은 곳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탁자식 고인돌이 주를 이룬다. 화순·고창 고인돌과 달리 여러 지역에 흩어져 분포하고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사적 제137호), 강화 내가 오상리 고인돌(인천시기념물 제16호), 강화 대산리 고인돌(인천시기념물 제31호),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인천시기념물 제32호)

830여기에 달하는 해남의 고인돌


해남지역에는 83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앞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수치와 맞먹는 대단한 숫자다.
따라서 해남을 고인돌의 천국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해남의 고인돌은 산이·마산·화산·현산·송지등 주로 해안선을 따라 분포한다.
화산 연정리 고인돌 군(표기는 지석묘 군으로 되어 있음, 전남도기념물 제165호)은 좁은 공간에 무려 48기가 남아 있다. 국도 13호선을 따라 화산면소재지 방면으로 가다보면 좌측 삼봉산 아래 석정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숲과 조화를 이루며 고인돌이 분포한다.
도로에서 불과 30m쯤 비껴난 곳으로 접근성도 좋다. 이곳의 고인돌은 남방식으로 바둑판같은 뚜껑돌을 받침돌로 괸 형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북방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남방식)으로 구분된다.
고인돌의 배치는 남쪽 35m, 동서 20m의 범위 안에서 삼각형에 가까운 군집을 이룬다. 방향은 계곡과 산줄기의 방향인 남북으로 분포하며 큰 고인돌을 중심으로 작은 고인돌들이 배치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가운데 19기는 3m 이상이고, 4m가 넘는 것도 5기나 된다.
아쉬운 것은 80년대 들어 임야를 개간하고 경지정리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산과 들에 흩어져 있던 많은 고인돌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는 점이다. 앞서 학계에서는 해남의 고인돌을 831기로 확인했으나 지금은 연정리 고인돌 군과 방축리 고인돌 군(전남도기념물 제115호)을 제외하면 정확히 그 수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선돌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유적인 고인돌은 초기 철기시대 묘제인 움무덤이 등장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해남지역에서도 그때부터 강력한 세력이 형성됐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이를 입증하는 고인돌이 방치되고 사라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다.
해남의 중심이었던 화산
예전 김포 땅이었다가 인천시에 편입된 서구 검단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 가현산에서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는 야트막한 구릉지에 고인돌 군이 있다. 분포돼 있는 고인돌은 모두 10기로, 탁자식과 바둑판식이 섞여 있다. 정확한 명칭은 검단 대곡동 고인돌 군(인천시기념물 제33호)이다. 10기 중 탁자식 고인돌 2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인돌이 매몰되거나 주위에 흩어져 파괴된 상태이나 탁자식 고인돌의 받침돌로 보이는 돌들이 놓여 있어 이 고인돌군은 탁자식이 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가. 놀랍지 아니한가?
검덕굴과 마찬가지로 검단지역도 한강유역을 근거지로 한 일정한 세력권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마치 ‘검’의 숨은 그림찾기를 보는 것만 같다.
화산은 한때 해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도처에 당시를 일깨워주는 지명이 산재한다. 해남이 색금현(塞琴縣)이었을 때 치소가 있었다는 평호리 사포마을은 지금도 색금이라고 부른다. 또 안호리 ‘548번지’는 ‘색금부사터’라 하여 색금현 원님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어란포라 불리는 연곡리와 관두량이 있던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인 관동리 또한 해남의 찬란했던 영화를 간직한 곳이다.
지금은 간척이 돼 육지가 됐지만 예전 관동 만호바다의 물이 월호리 재동마을 앞까지 넘실댔다. 하여 재동 아랫마을 이름도 배가 닿았던 곳이라는 데서 ‘선창’으로 남아있다.
이곳 재동에 박남수 고가가 있다. 지금은 쇠락할 대로 쇠락한 고가의 모습이나 한 시절 서울 남대문 상권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거부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비록 폐가로 방치된 상태지만 안채의 규모나 팔각정의 정원으로 볼 때 제법 격식을 갖춘 고가다.
상량문에 ‘대정(大正) 5년’이라 쓰여 있어 1916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100년 된 고가인데 폐가로 몰락했으니. 한때의 부귀영화가 덧없게 느껴진다.


덤벙산에 대한 기억


2003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이옥배 화산면장(작고)으로부터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 면장은 자신이 어린 시절 놀던 산중턱에서 발을 구르면 북소리마냥 소리가 난다고 했다. 산에서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는 그 전에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둥둥산이 소개되면서 미스터리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런 곳이 해남에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면장의 안내를 받으며 간 곳은 연곡리 봉저마을의 덤벙산이었다. 말바위가 있었다는 고개에서 논길을 따라 들어갔던 기억. 90년대 초반 도로를 내면서 무지한 공사감독관의 지시로 말바위를 묻어버렸다고 한다. 더욱이 도로공사를 하면서 많은 자기편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조치도 없이 개발이라는 명분아래 묻혀버린 것이다.
부산(浮山)이라고도 했던가. 산길로 접어들어 ‘중사당고개’라는 곳에 다다라 어느 지점을 골라 이 면장이 발을 구른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북소리가 나는 거였다.
이 면장의 말로는 산 주위로 많은 샘이 솟는 걸로 봐서 산속으로 물길이 나있는 거 같다는 얘긴데. 그렇다고 산이 울릴 까닭이 있을까. 양양의 둥둥산은 고분으로 추정되는바 발굴 작업을 하려해도 이를 신성시하는 마을주민들의 반대로 못한다고 했다.
문외한이라도 그리 크지 않은 규모라 고분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러나 이곳은 고분으로 보기에는 산의 규모가 양양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새삼스럽게 덤벙산 이야기를 꺼내든 것은 그 후로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을 ‘전혀’ 만나보지 못한 까닭이다. 당시 이곳을 안내했던 이 면장도 고인이 돼 북소리가 나던 지점을 찾는 것마저 어렵게 됐다. 더군다나 해남사람들조차도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연정리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국도 13호선에 있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그만큼 낯선 이야기가 돼버린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검덕굴은 ‘금숙굴(골)’이라고도 부른다. 일설에는 금이 묻혀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예로부터 이곳이 명당으로 꼽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땅 팔자, 사람 팔자라고 했던가. 옛날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곳에 고인돌이라는 무덤을 썼을까. 후대에 발복할 명당임을 진즉에 알아본 것일까.
고인돌이 놓여있는 풍경은 차분한 것이 왠지 긴장의 끈마저 늦추게 한다. 왜일까.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허물어뜨리고 만 것인가.
‘죽음이 너무나 가벼워서/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돌로 눌러 두었다./ 그의 귀가 너무 밝아/
들억새 서걱이는 소리까지/ 뼈에 사무칠 것이므로/ 편안한 잠이 들도록/ 돌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대 기다리며/ 천년을 견딜 수 있겠는가.‘ -염창권 ’고인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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