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사 연리지와 대흥사 연리근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뚜렷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연리지(連理枝)란 맞닿아 연이어진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맞닿아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연리지는 원래는 하늘까지 이어진 지극한 효성을 상징했으나 지금은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진한 부부애를 비유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연리지의 가치를 활용한 대전 중구의 뿌리공원
지난 2월 대전 중구에서는 나무 하나를 옮겨 심기위해 이틀간 온 도심이 들썩였다.
80년 수령의 느티나무 연리지를 효 테마파크인 뿌리공원에 옮겨심기 위한 과정 때문이었다.
중구 공무원들은 연리지의 주인으로 부터 나무의 기증의사를 접수 받은 후 1년을 공들여 나무를 관리했고 이날 나무를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장애물을 넘어가기 위해 50톤짜리 크레인과 포크레인 등이 동원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난관에 봉착한 사람들은 헬기 수송 작전까지 펼치려고 했으나 하중 때문에 포기했고, 장장 이틀간의 사투 끝에 이식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대구 중구의 연리지는 맞닿아 이어진 가지만도 5군데가 되는 희귀목이어서 산림청에서도 1억이 넘는 가격을 제시하며 매입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대전 중구는 이 나무를 예정대로 뿌리공원에 이식했다. 공원내 연리지가 심어진 잔디광장은 야외전통혼례식장, 부부의 영원한 사랑, 연인들의 언약장소, 가족애를 북돋는 명소가 되고 있다.
조상들은 연리현상을 경사스러운 길조로 여겼다.
우리 조상들은 연리현상의 나무가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여겼다. 그래서 연리근(連理根), 연리목(連理木), 연리지(連理枝)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사람들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나라 연리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신라 내물왕 7년(362) 4월에 시조 묘의 나무가 연리되었으며, 고구려 양원왕 2년(546) 2월에 서울의 배나무가 연리 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또한, 광종 24년(973) 2월에 서울 덕서리에서 연리지가 났으며, 성종 6년(987)에 충주에서도 연리지가 생겨났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처럼 연리지의 출현을 일일이 기록할 만큼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생각 한 것이다.
고려 중기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의 고율시(古律詩)에 친구 사이의 우정과 혈육의 정을 연리지에 비유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도 “연리지 가지 끝엔 붉은 꽃, 서러워라 내 인생 나무만도 못하구나”라고 하여 이승에서 못다 한 정을 저승에서라도 나누려는 서러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리지는 백거이(白居易)가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悲戀)을 애절하게 읊은 것으로 유명한 장한가(長恨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두 사람의 언약 부분인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라는 구절이 두루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래 연리지는 하늘에 사무치는 효성이 나무로 화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써, 후한서(後漢書)의 채옹전(蔡邕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효성이 지극한 채옹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운 모친을 삼 년 동안 온갖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도 시묘(侍墓)하는 것을 예(禮)에 맞게 하였는데 그 후 채옹의 집 앞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를 맞대었고,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많이들 와서 구경하였다’

문내 충무사엔 연리지, 대흥사엔 연리근이 있다.

 

나무의 뿌리가 서로 만나서 이어지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 가지가 서로 뻗어 하나로 이어지는 현상을 연리지라 한다. 연리근과 연리목은 주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연리지는 극히 드물다.
천년고찰 대흥사 느티나무 연리근(連理根)도 소원 나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어디에도 이렇게 뚜렷하게 이어진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지역에는 문내 우수영 충무사 뒷편 소나무 숲 사이에 빼어난 풍모의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하늘높이 뻗어가다, 두 나무는 하나가 됐다. 어느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나 두 나무가 하나가 됐는지 보면 볼수록 신기할 뿐이다.
연리지가 있는 충무사 언덕 아래 마을 선두리에는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이 있어 의미가 새롭다. 조석창 감응비는 부모생전과 사후에도 지극한 효성을 다한 효자 조석창의 효행을 기록한 비각이다. 조석창의 지극한 효행을 본 호남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1863년(철종 14년)에 조정에서 포상해 건립된 비각으로 19C말 효자비각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어 지난 2011년 해남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향토문화 유산으로 지정됐지만 보전 관리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어서 아쉽다.
충무사 연리지 아래 무덤 하나가 애처롭다. 누구의 넋이 이토록 사무치기에 나무는 그리움에 서로의 손을 맞잡았을까. 사람들은 이생에서 못다한 한을 저승에서라도 풀고싶은 간절한 마음을 품는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이루어보려고 했을까. 충무사 연리지 주변의 이러한 사연들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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