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李蘭影)은 1916년 6월 6일, 목포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로 호적에는 이옥순(李玉順)으로 기록돼 있다. 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15세 시절인 1930년에 여배우가 되려고 태양극단에 입단한다. 이 때 박승희가 이난영이란 예명을 지어준다. 그러나 무대에 주연으로 서지는 못했다. 1933년에는 태평레코드에서‘시드는 청춘’을, 오케레코드에서는 ‘향수’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1943년까지 이난영은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간판 스타 역할을 했다.
1935년에 최고의 인기곡이자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된다. ‘목포의 눈물’에 얽힌 비화 한 토막.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해 1등에 당선된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꿔 남인수가 취입하려 했던 ‘갈매기 우는 항구’ 라는 손목인의 곡에다 취입을 해서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난영은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이며,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해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했고, 1937년에 가수 겸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으로 당대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유명인이 됐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도 김해송의 지도를 받아 유명한 작곡가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극단에서 활동한다. 1945년에 KPK악단의 프리마돈나로 때론 단발과 남장도 마다지 않았고, 1947년 최초의 국산 음반 제작에 성공한 고려레코드에서는 광복 이후 첫 번째 가요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로는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면서 다시 혼자가 됐다. 1963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했고, 1965년 3.1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가 제작됐다. 목포를 상징하는 가수로서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가 조직돼 있다.
지난 3일 저녁. 목포 문화예술회관 광장에서 목포 난영 가요제가 열렸다. 이난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가요제에는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가요제가 끝나고 목포가 지역구인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와 회동을 한 손 전 고문은 정치 재개를 위한 행보를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강진의)이웃 동네에서 이난영 여사 100주년 기념식이 있다고 해서 와보니 생각보다 (행사가)훨씬 크다. 만명쯤 모였을까”라며 말머리를 피해갔다. 이 자리에서 박 원내대표는 “손학규를 위하여”라는 건배사를 했고. 지지자들은 “손학규 대통령”이라며 맞받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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