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유난히 쓸쓸했다.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았던 청춘의 방정식.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떠도는 나그네 되어 무작정 찾아간 광주(光州). 그곳에서 친구인 N과 만났을 때. 그는 연인인 S와 함께였다. 스무 살 시절. 수원에서 모임이 있던 날. RNTC 하사관(부사관으로 바뀜)으로 5년이라는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던 N은 대낮의 통음으로 만취가 되어 현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내 인생은 하사가 아니야!” 그의 청춘은 불안했고. 불안은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어느덧 전역을 하고. 대학을 마칠 무렵 N은 공기업 간부사원 공채모집에 당당히 합격하여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N이 그렇게 안정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때. N과 또 다른 친구 Y와 함께 N의 고향인 광양 옥룡면 추산리를 찾아간 적이 있다. 우리는 백계산 동백숲에 누워 넋두리처럼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는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그랬다. 그것은 청춘의 만가(輓歌)와도 같았다. 붉게 절정을 이룬 동백꽃. 그 꽃길을 걸어 마을에 다다랐을 때 우람한 당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N은 지나가는 말로 당산나무를 들려주었다. 당산나무 덕에 마을에 수재(秀才)가 나온다는. 그런데 당제(堂祭)를 지내지 않자 수재가 나오고 있지 않더라는. 듣고 보니 어쩌면 N이 그 마지막 수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달산 조각공원의 추억

N과 오랜만에 광주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그의 연인 S를 만나 목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로 기억되는 목포는 그때까지만 해도 유달산, 삼학도의 단편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목포에 내리자마자 유달산을 찾아갔다. 거기서 우리는 유달산 조각공원을 만났고. 그곳을 거닐었다. 산중턱에 조각공원이라니. 나중에 안 것이지만 유달산 조각공원은 1982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전시장으로 문을 열었다. 조각공원을 거닐며 나는 N과 그의 연인 S에게 조각상 앞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즉흥적인 해설을 들려줬다. 해설에 믿음을 주기 위해 ‘마르셀 뒤샹과 까반느와의 대화’를 두서없이 곁들였다. 왜 그랬을까. 기발한 발상으로 현대미술에 강한 자극과 영감을 불어넣은 ‘레디메이드’ 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1887~1968)을 굳이 끌어들인 것은. 실존과 허무 사이에서 곡예를 하는 청춘의 불안은 그런 알량함인가. 어쨌거나 그것은 내 젊은 날의 치기로 밖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조각공원에서 우리는 곧장 유달산 이등봉에 올라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색한 미소로 어깨동무를 하고. 청춘에 떠밀려 가는 초조한 모습으로 피사체가 되었지. 그리고 산을 내려와 삼학도 선술집에서 보해소주를 마시며 목포와 작별했던 기억. 시간이 흘러 이제 나는 다시 해남 땅끝 조각공원에서 그때를 추억하는 것이다.

조각공원을 둘러싼 기막힌 모순들

 

2003년 가을 무렵. 송지면 통호리 마을동산에 수상한 소문이 돌았다. 어마어마한 테마파크가 들어선다는, 그 소문은 마치 에버랜드급으로 부풀려져서 금세라도 땅끝에 천지개벽할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만 같았다. 이러한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낯선 조형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동산에 세련된 조각상이라니. 이런 호사가 없었다. 땅끝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조각상들이 하나 둘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내 ‘땅끝 조각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이런 곳에 웬 조각공원? 누가 이 먼 곳까지 이를 보러 온담? 아니야, 땅끝에 조각공원이라.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땅끝과 완도의 앞바다가 보이는 수려한 풍광은 마치 천상의 정원과도 같지 아니한가. 두고 보라지. 머지않아 땅끝의 새로운 명소가 될 터이니. 애물단지가 될 거라는 불길한 예상과 땅끝의 명소로 자리매김할 거라는 막연한 희망사이에서 문을 연 땅끝 조각공원의 현주소는 안타깝게도 전자에 가깝다. 땅끝 조각공원은 3만9천㎡ 부지에 26점의 조각작품이 전시돼 있고, 378㎡의 규모의 아담한 ‘ㄱ미술관’을 갖췄다. 하지만 우려대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미술관의 문은 굳게 잠겨있고 조각공원에는 인적이 끊겼다. 그런 사정이라면 진즉에 폐허로 버려졌어야 됐을 텐데도 공원은 여전히 말끔히 단장된 모습이다. 꾸준히 관리가 되고 있다는 증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외진 곳에 전시된 조각상들 모두가 수준급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김영중, 전뢰진, 최기원, 김수현, 박진환, 김오성 등등 면면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모두가 현대 한국 조각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가들이다. 그런데도 비밀의 정원에 감춰진 보석처럼. 쓸쓸히 땅끝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선 장식품으로 전락한 모습이라니. 이 기막힌 모순을 어찌할거나.

전시된 거장들의 조각품

 

ㄱ미술관 옆 계단을 올라서면 땅끝 조각공원이라는 표지석 뒤로 전뢰진, 김영중, 최기원의 작품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전뢰진(87)은 석(石)조각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다. 그는 스승인 윤효종의 아뜨리에에서 작업을 하며 기반을 닦은 것으로 알려진다.
“돌조각가의 인생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당시 시청 앞 반도호텔 지하에 분수조각을 윤호중 선생님이 맡고 있었다. 석공을 데려다가 용머리를 만드는데 우연찮게 석공감독을 내가 하게 됐다. 그때 화강석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석공에게 망치와 정을 빌려 돌조각을 만들어 봤다. 처음 쪼개어보는 돌이었기에 서툴러서 손이 멍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 소녀상 하나를 완성했다. 그 날을 계기로 내 조각인생이 시작됐다.”
운명처럼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된 전뢰진은 대학졸업 후 국전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였으며 1961년에는 국전 추천작가가 됐다. 전시된 작품 ‘유영’은 바닷물고기와 같이 어울려서 놀고 있는 소년소녀의 모습을 표현했다.
남도 조각의 출발은 장성출신의 김영중(1926-2005)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영중은 한국 현대 조각 1세대 조각가로 서울대에서 김종영에게, 홍익대에서는 윤효중에게 각각 사사했다. 김영중은 한국적 조형성의 개념과 양식을 바탕으로 현대조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다. 또한 공공미술의 개념을 도입한 조각공원을 조성하고 목적성을 가진 기념 조각을 제작하는 등 조각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아울러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설과 조형물 1% 설치법을 제도화하는데 역할을 한 미술 행정가이도 했다. 전시된 작품 ‘투루소의 모뉴반’은 여체의 구조적 해석으로 여인의 섬세한 감정을 쉽게 표출 할 수 있는 신체부위를 제외한 동체만 가지고 상징성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최기원(81)의 작품에 일관되는 주제는 ‘원초적 생명에 대한 은유’이다. 1962년 작 ‘태고’에서 최기원이 가진 만물의 발생적 상황, 근원적 형태에 대한 고고학적 또는 발생학적 탐사욕구는 이후 ‘탄생’시리즈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전시된 작품 ‘탄생’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새로운 생명이 생성되는 극적인 순간을 표현함으로서 전체적으로는 강한 응집력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개척정신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탄생’이란 상징성을 담보한 것으로서 모든 존재의 양태가 카오스적으로 잠재된 ‘태고’에서 풍기던 정태적(靜態的) 이미지는 ‘탄생’에 오면서 약동하는 힘으로 탈바꿈해 형상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남출신의 시인이자 조각가인 박진환(76·예명 박달목)은 2005년 전북 군산으로 귀촌해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인근 술산초등학교에 자신과 두 아들의 조각작품 102점을 기증하여 전시함으로써 화제가 됐다.
조각공원의 작품 26점 가운데 가장 고가의 작품은 맨 꼭대기 연못 한가운데 놓인 ‘봄 아가씨’다. 이 작품을 제작한 김오성(71)은 전북 부안 변산에서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 관장 겸 천문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고교 중퇴 후 농민교육자였던 부친을 도와 농장일을 하다가 상경해 조각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각가들의 조수로 일하며 인체조각의 대가였던 백문기와 김경승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모시며 수련한지 8년 만에 국전에서 특선을 하며 조각가로 이름을 알렸다.
군산대 교수인 백철수는 서예의 획이 만들어 내는 유연하면서도 역동적 힘을 조각 작품으로 재탄생시켜온 조각계의 중견 작가다. 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면서 미술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백철수는 이후 한국의 선에 포커스를 맞춰 서예의 획을 작품화하는 독특한 창작으로 눈길을 끌어왔다. 그는 “나의 작품 속에 표현된 획은 동양의 모필(毛筆) 문화에서 만날 수 있는 운필(運筆)에 의한 서법적 획 즉 서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획으로부터 전이된 입체 표현”이라고 작품을 설명한다. 전시된 작품 ‘바다와 땅의 만남’은 땅과 바다의 끝과 시작의 의미로 한자 ‘입(入)’을 형상화 해 해남군민의 희망과 꿈을 향해 ‘들어가는’ 관문으로 표현했다. 아울러 두륜산의 이미지를 산의 형상이 드러나게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바다의 향기’를 제작한 이동훈은 자연의 생명체에 대한 생성과 변형, 이질적 형상의 개입을 시도함으로써 주목받는 작가. 지난 2008년 울돌목에 ‘고뇌하는 이순신 장군상’을 제작한 작가이기도 하다.

애물단지냐, 명소냐 판단은 아직 일러

 

땅끝 조각공원은 시작부터 말이 참 많았었다. 개장 이듬해인 2004년 7월에는 해남군의회 정례회 문화관광과 업무보고 자리에서 의원들은 땅끝 조각공원은 이미 확보된 지방양여금을 쓰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조각공원사업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것 같다며 자칫 이 공원이 주민들에게 고통과 숙제만을 남겨놓은 애물단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같은 염려는 조각공원이 땅끝의 이미지, 해남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찾기 힘든데다 관광객들의 입맛에도 맞지 않을 것이란 나름대로의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해남군의 관광정책의 변화가 없는 한 해남다운 것을 상실해버리고 정체불명의 시설물들만 난립하는 관광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몰아붙였었다. 하지만 이러한 당시 군의회의 지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땅끝과 해남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분명 존재하며 현재로서는 애물단지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땅끝조각공원은 총 3만평 부지에 104억원의 사업비 가운데 민자 66억원을 유치해 상가, 여관, 전시관 등의 시설물을 조성한다는 것이었으나 무산됐다. 이는 우려가 현실화 된 경우다.
또 있다. 2007년 2월에는 땅끝조각공원 주변 5만8천여평에 실버타운을 겸한 관광자연농원을 조성키로 하고 민자 443억원을 투자해 2008년까지 사업을 시행한다고 했다. 실버휴양 관광자연농원에는 콘도와 팬션, 방갈로를 비롯해 관광농원, 자연학습원, 자연휴양림, 식물원, 분재단지, 전망대 등 숙박시설과 관광휴양시설이 들어서며, 운동오락시설로는 썰매장과 게이트볼장, 해수탕, 레스토랑이 각각 시설될 계획이었으나 이 역시도 무산됐다.

해법은 한류 드라마 촬영지 뿐?

혹자는 땅끝 조각공원과 ㄱ미술관의 활성화 방안을 제법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 ㄱ미술관으로 작명한 배경은 또 어떠한가. 일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한반도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땅끝 마을에 들어선, 오랫동안 ‘기억(기역)’에서 사라지지 않을 곳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지난 2011년을 보자. ‘놀랍게도 8년 동안 3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는데’ 이에 힘입어 군민과 지자체가 국가 인증 1종 미술관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또 미술관 운영위원들이 27점의 조각 작품과 일반 회화작품 73점 등을 기증 및 협찬 받아, 이 계획이 성공할 경우 땅끝 조각공원과 더불어 ㄱ미술관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소장품을 가장 많이 간직한 미술관으로 거듭날 것이라고도 했다. 나아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브레겐츠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KUB)’ 미술관에 비유하고 있다. KUB가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설립 준비에서부터 테마를 가지고 접근했고. 이 KUB에 ㄱ미술관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는 것이다.
“땅끝 마을 미술관은 주목할 일이지만, 척박한 풍토 아래 미술관이 온전히 제 기능을 할 것인가 하는 일반적 우려를 넘어서는 것이 과제다.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면서 동시에 세계적 수준의 작가와 작품을 전시 감상할 특별한 콘텐츠를 준비해 접근한다면 성공한 미술관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이를 위해 당국과 미술관이 적절한 계획을 마련해 과감히 실천하고 지역 문화인들이 미술관을 자주 찾으면서 홍보에 나서면 성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물론 혹자의 바람대로라면 일리있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은 현실을 감안할 때 실현 불능이라 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방법은 단 하나. 한류 드라마를 이용하는 것이다. ‘겨울연가’나 ‘가을동화’처럼 드라마의 현장으로 적극 활용해 먼 길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게끔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방법 밖에는 달리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비밀의 정원으로 밀려나는 아쉬움

땅끝 조각공원에 오르면 멀리 땅끝 전망대가 보이고. 백일도, 흑일도, 동화도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다. 이 시원한 눈맛만으로도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전시된 조각품들은 오히려 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남군은 기왕에 이러한 조각공원을 만들었으면 땅끝의 명소로 키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일일이 방송국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이곳을 배경으로 한 감동적인 드라마를 유치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남이섬과 속초 아바이 마을, 제주 섭지코지와 같이 말이다. 무명의 장소를 일약 명소로 만드는 힘. 그것은 드라마의 힘이다. 앞서 해남군은 근거도 없는 허준 유배지 세트장을 일약 관광명소로 부각시킨 전례가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감성을 자극하는 드라마를 유치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런 다분히 속이 보이는 생각이 든 것은,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들러 사색하고 심신을 정화할 수 있는 이 기막힌 최적의 공간이. 찾는 이 없는 비밀의 정원으로 밀려나는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이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주제를 지닌 이 조각상들의 진정한 가치를. 사람들은 언제쯤이나 알고 찾아줄는지. 완도 앞 바다의 풍광을 몇 번이나 쫓으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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