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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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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10  09: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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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오는 8월 31일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난중일기 독후감 및 이충무공 유적답사기’를 공모하고 있다. 공모전은 난중일기 독후감과 이충무공 유적답사기 등 2개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문화재청의 공고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해남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행적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1597년 음력 8월 20일 장흥 회령포(장흥군 대덕읍 회진리)에서 북평 이진(梨津)으로 진을 옮긴다. 회령포 앞 포구가 협착하다는 이유였다. 이진으로 옮긴 이순신은 다음날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곽란이 일어 몹시 앓는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이윽고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 했다. 밤을 앉아 새웠다(21일)’, ‘곽란이 더욱 심해져 거동할 수가 없었다(22일)’, ‘통증이 몹시 심해 배에 머무르는 것이 불편해 뭍에 나와 머물렀다(23일)’, ‘일찍 도괘(刀掛, 북평면 남성항?)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어란(於蘭) 앞 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벌써 텅텅 비었다. 바다에서 잤다(24일)’. 이진에서 어란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행적이다. 난중일기 기사로 보면 이순신은 이진에 와서 심한 곽란으로 고생을 했고. 가까스로 이를 진정시키고 나서 어란으로 향했음을 알 수가 있다.

만호진을 복원한 목포시

어란과 이진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 만호진(萬戶鎭)이 있던 곳이다. 전략상 주요 포인트였다는 얘기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왜군이 내쳐 서해안을 따라 서울로 치고 올라가기 위해 해남으로 왔을 때도 이곳에 머물렀다.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해전이 우수영 앞바다인 울돌목에서 이뤄졌다면 어란과 이진은 명량해전의 배후로서의 역사성을 띠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란 여인’과 같은 이야기도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어란진과 이진은 폐허나 다름없는 성곽만 일부 남아 있을 뿐 만호진으로서의 모습은 상실한 상태다. 주둔했던 수군만호들의 공덕비도 어란 경로당 앞과 이진 초등학교 정문 앞에 마치 애물단지처럼 방치돼 있다. 이래가지고서야 역사를 제대로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자랑스러운 역사든 치욕의 역사든 온전한 복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치욕의 역사라도 반면교사 삼아 전철을 밟지 말자는 경계의 의미로서 나름대로의 교훈적 가치를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포시는 지난 2014년 만호진을 복원했다. 당시의 목포 또한 어란과 이진과 같이 전라우수영에 속한 만호진이었다. 목포진에 대한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목포진에 대한 기록은 태조6년(1397) 5월, 전라도에 목포를 비롯한 4개의 진을 둔다는 기사가 보인다. 물론 이때의 목포는 현재의 목포와는 다른 지역이다. 전라우수영의 전신인 처치사(處置使)의 주둔지가 당시에는 무안현 대굴포(함평군 학교면)였는데 이곳과 연관이 있다. 세종14년(1432) 8월에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가 목포만호가 대굴포까지 들어와 있어 불편하니 지금의 목포로 옮겨 응변에 편리하게 해달라는 상주(上奏)가 있었고, ‘세종실록’에는 전라도 순찰사의 계문에 본도 수영을 목포로 옮기고 목포의 병선을 황원(해남군 문내면) 주량으로 옮긴다고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종15년에 목포병선을 주량으로 옮기고 6년 후인 세종21년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만호진이 들어선다. 목포진성은 연산군 6년(1500)에 축성해 1502년에 완성된다. 그리고 목포진은 어란진과 이진과 함께 고종21년(1895)에 삼도수군통제영과 각도의 수영이 혁파되고 수군이 해산됨으로써 폐진된다.

해남에 숨어 있는 정유재란의 역사

어란진성 복원을 위한 움직임이 마침내 가시화 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란진성 복원은 벌써 6년 전인 2010년에도 나왔던 얘기다. 당시 용역을 맡았던 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측은 고문헌을 통해 어란진성의 위치와 성지, 성벽 등이 확인됐다며 역사문화와 경관이 어우러진 관광자원으로 향후 개발 가치가 높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어란진성은 정방형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평지성으로 복원할 가치가 충분하다. 해남군은 어란진성과 연계해 ‘어란 여인’ 현창 사업도 병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전향적으로 정책의 방향을 설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에 이진, 서에 어란 양진을 복원하고 우수영을 국가사적으로 성역화한다면 해남은 명실상부한 호국의 성지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잇을 것이다.
아울러 왜군포로수용소로 추정되는 삼산면 평활리와 충리에 대한 정밀한 발굴조사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 또한 ‘어란 여인’의 단초가 됐던 사와무라 하치만타로의 유고집을 근거로 지난 1980년에 기사화됐던 일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구체적인 조사는 커녕 정확한 위치의 확인도 않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를 유린한 왜군은 시마즈 군대였다. 장성~나주~영암~해남을 따라 전라우도로 남하하며 전라도를 경략하려 했다. 시마즈가(島津家) 문서에는 ‘전라도 해남 방문지사(榜文之事)’가 전한다. 일종의 선무공작이다. 그런데 왜군포로수용소가 해남에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이순신의 행적을 찾아가는 길에는 이처럼 많은 역사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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