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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역사, ‘어란 여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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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7  21: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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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於蘭) 여인’은 허구(虛構)다. 적어도 이 이야기는 이러한 전제로 시작해야 맞다.
10년 전인 2006년. 송지 산정리에 거주하는 박승룡 선생이 ‘어란 여인’을 일반에 공개하자, 이의 실체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다. 호사가들은 ‘실존인물이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얻은 것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왜? 어란 여인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물증이 될 만한 사료(史料)가 없기 때문이다.
설혹 사료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진위를 둘러싼 구설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네 강단사학(講壇史學)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다. 식민사관에 얽매여 우리 역사를 한반도 강역 내로 한껏 구겨 넣은 것도 모자라 대륙을 경영했던 고대사를 부정하려 드는 옹졸함을 보이고 있으니. 그런 그들에게 어란 여인의 이야기는 가히 몽상가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란 여인은 해남의 이야기다. 우리의 살아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에 와서 어란 여인(이하 어란)의 실체를 따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울러 왜곡된 역사를 전혀 부끄러움 없이 가르치며 강단의 주류로 버젓이 행세해 온 일단의 역사학자들에게 정의로운 평가를 기댄다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분명한 것은 어란은 뜨거운 논쟁 속에서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역사가 됐고. 감히 나는 지금, 어란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나름의 ‘현대사’를 서술하려는 것이다.

왜선 안에 있던 여인

   
▲ 어란이 투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낭터와 어란여인 상

어란은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타로(澤村八幡太郞, 1898~1988)의 유고집을 근거로 한다. ‘문록(文祿) 경장(慶長)의 역(役)’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고집이다.
여기에 어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명량해전(鳴梁(유고집에는 洋으로 표기)海戰) 대패(大敗) 사유(事由)’라는 제목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의 장수 간 마사카게(菅正陰)는 경상남도 통영을 근거지로 해서 남서해안으로 진출한다. 전남 여수(좌수영)을 거쳐 우수영(해남)으로 가려고 수로가 험한 명량해를 탐사차 어란진에 주둔한다. 선박의 수리와 진군 준비를 위해 체류중이던 장병들은 주색에 빠지고 특히 간 마사카게는 이순신 수군의 간첩인 주루미기(酒樓美妓) 어란(お蘭으로 표기)과의 하룻밤 꿈같은 사랑을 나누던 중에 일본 수군의 출발(헤어질 일시) 날짜를 누설한다.
이로 인해 조선 이순신 수군 측은 대등한 작전으로는 불리함을 알아차려 울돌목에서 진도 벽파진 사이에 대나무로 만든(죽지제·竹枝製) 새끼 2본(本)을 깔아 선박의 통행을 어렵게 해 침몰하도록 설치했다. 고니시 수군의 우수영 출발 선도선 수 척을 유인해 고니시 수군의 출발을 보고, 그 후방 연안에 숨겨놓은 작은 배 수 척에 지초(芝草)를 가득 싣고 그 뒤를 따르게 한다. 마침내 고니시군 선단은 명량해의 격류를 타고 용감하게 이순신 수군의 묘책을 모르고 진출한다. 그러나 바다에 깔아놓은 대나무 새끼(竹繩)에 걸려 (고니시 수군의) 배가 나아가지 못하자 (조선 수군은) 따르던 지초선의 지초에 불을 놓아 (이로 인해)순식간에 익사하고 선박과 무기는 불에 타 침몰하는 등 전군이 섬멸돼 대패하기에 이르렀다.’
유고집의 내용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미색이 뛰어난 기생을 왜군에 첩자로 보낸 것이 된다. 그러나 ‘난중일기’에 왜군의 동향을 정탐하는 탐망군관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월 27일 기사에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장계를 올린 것입니다. 그때에 ‘왜선 안에 있던 여인’에게 사실을 탐지해 곧장 장계를 올렸다 합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약 8개월 전의 기사인데 이때는 왜군이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전쟁을 중단한 채 주둔하던 시기이다. 기사에 ‘왜선 안에 있던 여인’이 등장해 이것을 근거로 어란의 첩보활동 가능성을 짐작할 수도 있다.

과연 어란은 기생이었을까

사와무라는 아마도 어란을 으레 기생이라 생각하고. 조선 수군이 보낸 간첩(또는 스파이)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이러한 가설에는 다소간에 무리가 따른다. 왜군이 어란진에 들어와서 명량으로 진출하는 기간에 간첩을 잠입시켜 미인계를 쓰고 적군의 장수를 유혹할 만 한 여유가 과연 있었을까. 어란이 어란 만호진에 딸린 관기였다고 해도 적장의 환심을 사고 정보를 들은 정황에는 무리가 있다.
유고집에 언급했듯이 간 마사가케가 통영을 근거지로 진출한 점을 들어 조선 수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칠천량 해전(음력 7월 15일) 당시 약탈한 양민의 처자는 아니었을까. 칠천량과 명량 해전(음력 9월 16일) 사이에는 두 달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어 왜군의 대장선에 동승하며 사랑에 빠졌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왜군에 포로로 있다 도망쳐 나온 김중걸과 관련한 ‘난중일기’ 정유년 음력 9월 14일자 기사를 보자.
‘김중걸이 이달 초 6일 달야의산(達夜依山, 달마산?)에서 왜적에게 붙잡혀서 묶여 가지고 왜선에 실렸던바,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인(金海人)’을 만나 왜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한밤중, 왜놈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김해인이 귀에다 대고 몰래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들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혹은 쏘아 죽이고 또 배를 불태웠으니 극히 통분할 일이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김중걸이 만난 ‘김해인’은 ‘임진년’에 포로가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5년 동안 끌려 다녔다는 얘기가 된다. 포로가 돼 왜성에서 생활하다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왜선을 타게 됐을 것이다. 김해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여자의 경우 이름 대신에 관향으로 호칭을 삼았다는 점에서 일단 포로가 된 왜군 ‘위안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가정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위안부’가 있었다는 데 기인한다. 1592년 7월 29일.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이 경북 김천 ‘지례전투’에서 왜적을 소탕하고 보니 호남에서 납치해온 얼굴 고운 여인군(群)이 끌려 다니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본영이 있던 함흥에서는 ‘생원 진대유라는 자가 자신의 딸을 일본군에게 주면서 그 밀정이 되었고, 의병을 밀고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임술)‘는 기사가 있을 정도다.

‘마다시’와 간 마사가케
   
▲ 어란은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타로의 유고집을 근거로 하고 있는 가운데 송지 산정 박승룡 선생의 노력으로 또 하나의 해남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난중일기’의 김중걸의 이야기를 근거로 어란(성명 미상이나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과 간 마사가케의 만남은 칠천량 해전보다 훨씬 전인 임진왜란 발발 당시 안골포 해전(1592년 음력 7월 10일)으로 거슬러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명량해전이 일어나던 ‘난중일기’ 1597년 음력 9월 16일자 기사에 항왜(降倭) 준사(俊沙)라는 자가 나온다. 안골포 해전에서 투항한 준사는 그림과 글이 넣어진 붉은 색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일본의 부장(部將)을 ‘마다시(馬多時)’라고 알려준다. 마다시에 대해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마다시’를 음역으로 볼 때 간 마사가케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온전한 이름은 간 ‘마타시’로 마사가케(菅又四郞正陰)이다. 우리말로 음역하면 정확히 ‘마다시’와 일치한다. 마사가케의 부친은 아와지(淡路)국의 1만 석 다이묘(大名)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이다. 아와지 섬을 지배하는 해적 10인방 중 한 명이었다. 미치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세 아들(장남·차남·삼남)과 함께 1592년 7월 17일 조선으로 출전했다. 7남인 간 마사가케가 참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간 수군’의 기록에는 마사가케가 250명을 통솔한 것으로 적혀있다. 250명은 부친인 미치나가가 갖고 있는 전체 병력이었다.
간 수군의 선봉에서 싸웠던 마사가케는 명량해전에서 ‘전라남도 벽파정하(碧波亭下)에서 전사’(鍋島直茂譜考補)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마다시는 간 마사가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지금의 어란이 아니었다?

‘어란 여인’의 실체를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의 어란이 임진왜란 당시 어란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어란 여인의 배경을 다른 곳으로 비정함으로써 논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할까. 이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해남현편에 ‘어란포영(於蘭浦營):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수군만호 1명’이라는 기록이다. 이를 근거로 어란이 화산 관두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관동리 일원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고어란포(古於蘭浦)’가 화산 연곡리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제주에 내왕하는 배가 여기에 머무른다’고 적혀 있다. 기록된 거리수를 감안하면 ‘어란=관두포’설은 대략 맞아떨어진다. 지금 어란이 있는 송지면은 당시 영암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해남현편에서 어란포영을 다룬 것은 어란이 해남에 속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지도서(1757년)와 대동지지(1862년), 호남읍지(1871년) 영암군편에는 ‘어란포진(於蘭浦鎭):남쪽으로 1백50리에 있다. 성의 둘레 1천4백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수군만호 1명’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의 어란은 해남현에서 영암군으로 옮겨진 상태다. 이를 근거로 하면 어란은 지금의 송지 어란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임진왜란 당시 어란을 지금의 송지면이 아닌 화산면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란리 경로당 앞에 있는 5기의 수군만호비도 18~19세기의 것으로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참고로 민족문화연구회가 1969년 발행한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영암군편’ 비고란 ‘진보(鎭堡)’에 이진진과 어란포진과 관련한 내용은 대동지지를 참고로 해서 번역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원문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없다고 해서 임진왜란 당시 어란이 송지면이 아니었다고 단정짓기도 애매하다. 어란진성에 대한 축성연대가 명확할 경우 화산면에서 송지면으로 옮겨온 시기를 대략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으나 이에 대한 기록마저 전무한 현실에서 이를 입증하기란 어렵다. 어란진성의 축성연대가 임란 이후일 경우 당시의 어란진을 화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어란진이 1434~1530년 사이에 현재의 어란진이 있는 곳으로 이전하였고. 지표조사 결과 어란진성은 임란이후인 1690~1765년에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의 이전과 성의 축조가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모호하기만 하다. 그 만큼 남아있는 사료가 빈약한 현실에서 임란 당시 어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덧붙이자면 사와무라가 송지면에 근무한 적은 없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해남에서의 그의 마지막 근무지는 화산면 주재소였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와무라였다 하더라도, 당시의 여건상 자신의 관할도 아닌 송지면으로 가서 설화를 채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화산지역에서 어란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를 으레 어란진과 맞물려 기록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란’이라는 지명

‘어란(於蘭)’이라는 지명은 여느 지명과는 달리 예사롭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어란을 ‘늘어진 난초’의 모양 같다고 해서 그리 이름 붙였다고 하나 이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하다. 화산면 연곡리의 ‘고어란포’라는 지명이 (관동을 거쳐)그대로 송지면 어란리로 옮겨온 것만 봐도 어란이 갖는 상징성은 지명(地名)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을 거라는 추축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일까. ‘어조사 어(於)’는 주로 처소격(~에게)이나 비교격(~보다)조사로 쓰인다. 이러한 한문적인 해석은 차치하고라도 지명에 어조사는 물론, ‘난초 란(蘭)’이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사군자의 하나인 난초는 향기가 좋아 십리향이라고도 한다. 은은한 향기가 그만큼 멀리 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난초의 속성상 어란이 갖는 한문적인 의미. ‘난초에게’, ‘또는 난초보다 (더)’는, 과거 번성했던 지역에 대한 호칭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가리켜 ‘화양연화(花樣年花)’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완도 고금도에는 어란 만호가 팠다는 ‘어란정(於蘭井)’이라는 우물이 있어 어란과의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행적들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의 행적을 ‘난중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8월24일(이하 음력). (이진(梨津)을 떠나)일찍 도괘(刀掛, 지금의 북평 남성항?)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어란 앞 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벌써 텅텅 비었다. 바다에서 잤다.’
그리고 이순신은 왜군이 이진까지 왔다는 보고를 받고 25~27일까지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에서 머문다.
‘8월28일. 적선 8척이 뜻밖에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수사(배설)도 달아나려고 했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다가오자 각지기(角指旗)를 흔들어 뒤쫓으니 적선은 물러갔다. 갈두(葛頭)까지 쫓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장도(獐島, 순천 왜성 앞 바다에 있는 보성군 장도? 다음해 9월 노량해전에 앞서 장도해전(왜교성 전투)을 치른다)로 옮겨 머물렀다.’
그리고 이순신은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옮겨가 진을 구축한다. 이진~도괘~어란 앞 바다~장도~벽파진. 이순신이 어란으로 왔을 때는 이미 곳마다 비어 있었다. 이진에서와는 달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묵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엿보인다. 여기서의 ‘어란 앞 바다’는 오늘날 만호바다일 것이다. 만호바다. 어란 만호진에서 유래한 이름은 아닐까. 또 관동리 ‘큰댓골 해안’에는 ‘이순신 수결(手決)바위’라 부르는 것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성시해서 아이들이 올라가 노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큰댓골이 있는 관두산에는 ‘낭강절벽’이라 부르는 낭떠러지가 있다. 낭강절벽의 낭강 또한 낭강(娘降), 즉 처자의 투신을 암시한 명명은 아니었는지.

복원해야 될 어란 만호진

어란 여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지도 어느덧 10년이 됐다. 한 일본인의 유고집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박승룡 선생이 현지를 답사하고 지역주민들의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해서 ‘어란 자료집’을 만드는 등 심혈을 기울인 결과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박 선생이 추진해온 어란 여인 현창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다행히도 최근 해남군이 ‘역사적인 실체가 없다’라는 이유로 사업을 외면해왔던 데서 태도를 바꿔 어란 현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동안 박 선생이 어란 여인에 대해 일본의 ‘해남회’와 꾸준히 교류하는 한편 전남도가 이를 도단위 사업으로 추진하려는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사료적인 근거가 없을 뿐이지, 장성군과 곡성군의 경우 소설의 주인공인 ‘홍길동’과 ‘심청’을 내세운 축제가 열리고 있는 마당에 ‘어란 여인’을 외면한다는 것은 옹졸한 태도임에 틀림없다. 욕심같아서는 훼손된 어란 만호진을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목포시는 지난 2015년 목포 만호진을 복원했다.
땅끝과 더불어 어란을 명량해전과 관련한 호국의 성지로 조성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일본’이라는 거부감 때문에, 충무공 이순신의 빛나는 전과가 혹시라도 훼손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혹시라도 ‘어란 여인’을 외면하려 든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인한 굴욕의 역사였다면, 이제 우리는 극일(克日)을 넘어 당당히 승리의 역사를 쓸 자세가 돼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란은 해남의 이야기다
   
▲ 여지도서(1757년)와 대동지지(1862년), 호남읍지(1871년) 드을 근거로 하면 어란은 지금의 송지 어란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진은 하늘에서 직은 현재의 어란마을 전경

북일 신월리가 고향인 시인 황지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야기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고증되지 않은 역사의 경우, 어차피 분분한 이설(異說)이 존재하는 한 허구일 수밖에 없다. 거듭 강조하건대 이제 와서 어란 여인을 두고 사료 운운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아울러 명쾌한 해석을 기대할 만큼 우리의 사학계가 열린 시각을 갖지 못한 것도 그 한 이유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어란’은 적어도 10년 동안 알려진 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모호한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임란이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진실이 묻히고, 또한 각색되고 왜곡되었겠는가. 하다못해 최근에 일어난 일들도 이설로 분분하다. 그런 면에서 어란은 ‘통틀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란 여인의 실체, 어란의 위치, 그리고 사서(史書)들의 진위여부 등등…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할 때 어란 여인은 분명 해남의 이야기다. 또 지금 어란은 송지면에 있다. 그런 현실적인 사실을 들어 어란 여인은 송지 어란을 배경으로 서술하는 것이 맞다.
박승룡 선생의 현지답사 결과 어란이 투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낭터와 어란을 제사지냈을 것으로 보는 당집과 석등롱, 그리고 현지주민들의 증언 등, 어란에 대한 밑그림은 그려진 상태다. 최근에는 1960년대 군내버스 승무원으로 일하며 어란에서 묵을 때 석등롱 근처에서 어란 여인과 관련한 비석을 봤다는 증언도 있었다. 역사 유적에 대한 증언이 대개가 1960년대를 상한으로 하고 있는 것은 70년대의 새마을사업과 무관하지 않다. 서낭당이나 당집과 같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어지간한 유적들은 미신과 구습타파라는 미명하에 사라져갔다.

두고두고 들려줘야 할 전설, 어란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속절없이 사라져 갔을까. 누군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전설과 신화로 포장된 옛날이야기인들 또한 대수더냐.
어란.
왜장과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던 비련의 여인. 그러나 풍전등화의 위기기 처한 나라를 위해 왜장이 누설한 출정 기일을 위험을 무릅쓰고 우수영의 조선 수군에 알린 여인. 정보제공으로 자신을 사랑한 왜장이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여인. 이것이 어란 이야기의 실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시 각색돼 앞으로 두고두고 들려줘야 할 해남의 새로운 전설이 될 것이다.

사와무라는 누구?

어란 여인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한 사와무라 하치만타로(澤村八幡太郞)는 일제시대 해남지역에서 순사생활을 했다. 1898년 일본 관동지방인 도치기(栃木)현 남서부의 아시카가(足利)시 출신으로, 1920년 10월 조선총독부 순사가 돼 순천에서 3년을 근무한 뒤 해남에서 19년을, 그리고 제주에서 4년을 보낸 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돌아가 군마(群馬)현 기류(桐生)시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를 창업하고 일본 열도의 패권을 꿈꿨던 아시카가 집안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근세 이후 아시카가 지역은 이웃인 군마현 북부와 더불어 직물업의 본고장으로 활기를 띠었다. 200년 직물업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 오리히메(織姬) 신사(神社)이다. 사와무라의 이름인 하치만타로는 일본의 군신(軍神)인 하치만(八幡) 신앙과 관련이 있어 작명에 신화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갑종 잠업학교를 졸업한 잠업 기수리기도 한 사와무라는 순천과 해남에서 순사생활을 하는 동안 지역주민들에게 양잠을 권하는 등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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