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산면 충리 마을회관 옆에 있는 이유길 유허비, 해남군 향토유적 제 1호로 지정돼 있다.

해남읍 용정리에 오충사(五忠祠, 해남군 향토유적 제16호)가 있다. 이름 그대로 다섯 충신을 모신 사우다. 마을의 이름을 따 ‘용정사(龍井祠)’로도 불리는 오충사는 숙종 38년(1712)이순신을 배향한 충무사로 건립됐다. 이어 영조 16년(1740)에 류형을, 정조 20년(1796) 이억기를 각각 배향하면서 민충사로 개칭됐다가 순조 29년(1829) 이유길, 이계년을 추배하면서 오충사가 됐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고종 31년(1894)에 다시 공적비를 세우고 단이 설치됐다. 이어 1919년에는 후손들에 의해 삼문과 강당이 건립돼 오늘에 이른다. 이들 오충사의 다섯 충신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충의공(忠毅公) 이유길(李有吉, 1576~1619)이다.

청백리 이후백(李後白)의 손자인 이유길은 부친(李善慶)이 임진왜란을 만나 마침 병환 중이던 어머님을 모시다가 적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18세 어린 나이에 충무공의 군대에 들어가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활약한다.

후일 명나라에 원군으로 출정해 후금과의 전쟁에서 분투 끝에 전사함으로써 그가 살았던 마을은 충신의 고장이라 하여 충리(忠里)라는 이름을 얻는다.

지금의 삼산면 충리다. 이곳은 원래 녹산면 지역이었으나 이유길로 해서 ‘충신터’ 또는 ‘충신’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와 대흥리의 각 일부와 삼촌면 화내리, 용두리, 도토리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해 충리라 해서 삼산면에 편입됐다.

 

▲ 해남읍 용정리에 있는 오충사,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함께 활약한 다섯 충신을 배향한 사우다.
‘충(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충(忠)·효(孝)·예(禮)’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지켜야할 도덕적인 가치로 배워왔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 그리고 예로써 사회규범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다. 충이 국가적인 개념이라면 효는 가정, 예는 사회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별개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 연관성을 갖는다. ‘효자 가문에 충신 난다’는 말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처럼 몸을 닦아 집안을 바르게 해야 나라에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충(忠)’의 한자만 봐도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의 결합으로 돼있다. ‘사람은 마음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충자에는 중정(中正, 곧고 바름), 진심(盡心, 마음을 다함), 일심(一心, 조국과 내가 하나가 됨), 충심(衷心, 속마음), 성심(誠心, 정성스런 마음), 진심(眞心, 참된 마음) 등의 뜻을 갖고 있다.

후한의 마융(馬融, 79~166)은 ‘충이란 중정한 것이니 지극히 공평하고 무사해야 한다(至公無私)’고 했다. 오로지 국가를 위하는 것이지 결코 개인적인 사사로움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또 주자(朱子)는 ‘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 즉 ‘충이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충·효·예가 우리의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반해 봉건주의 시대를 지배했던 윤리구조로서 통치자의 지배논리였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간과할 수가 없다.

 

심하 전투에서 죽다

이유길이 충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출병해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남의 나라 전쟁에서의 명분 없는 죽음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다. 더욱이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등거리 실리외교를 추구한 군주였다.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군사를 보내지만 대륙의 지배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후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1560~1627)에게 상황을 봐서 후금에 투항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실익이 없는 전쟁에 굳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의중을 헤아린 강홍립은 포로로 붙잡히는 척하면서 후금에 투항한다.

그러나 평안도 영유(永柔)현령으로 이 전쟁에 중군 부장으로 참전한 이유길은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분투중에 적의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해 누르하치(奴兒哈赤, 1559~1626)의 후금과 싸웠던 이 전쟁을 사람들은 ‘심하(深河) 전투’, 또는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건주(建州)여진의 작은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는 1583년 처음 군사를 일으켜 1616년 해서여진까지 병합해 여진족을 통일하고 칸(汗)에 올라 후금을 건국한 상태였다.

후금의 대륙 팽창은 명나라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광해군 11년인 1619년 2월,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1만3000명의 군사를 보내 누루하치의 본거지인 허투알라(赫圖阿砬)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해 3월4일 허투알라 근처를 흐르는 심하의 부차(富車) 들판에서 후금의 기습을 받아 7000여명이 죽고 4000여명이 항복해 포로가 되고 만다.

 

광해군의 실리외교와 인조반정

명나라가 병력을 요청했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 때 이미 신세를 진 처지여서 이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강성해지는 후금과 쇠약해지는 명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펴고자 했던 광해군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원군을 보낸 것이다.

심하 전투의 패배로 포로가 됐던 강홍립을 비롯한 조선군 대부분은 나중에 무사히 생환한다. 이는 광해군의 실리외교 덕분이었다. 누르하치는 여러 차례 조선에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어 명나라에 대항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사신도 보내지 않고 회신도 하지 않았다. 두 달 만에 광해군은 “후금의 국서에 회답하려 하지만, 명나라 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기 때문에 국서를 보내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댄 뒤, “두 나라는 전부터 원수진 것이 없으니 서로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

근래 조선에 투항해온 여진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돌려보낸다”는 전갈을 보낸다. 이에 누르하치는 크게 기뻐하며 포로들을 돌려보낸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인조반정으로 숭명배금주의자들이 득세하게된 것이다. 이는 조선의 불행이었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업신여겼던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잇단 치욕을 겪으며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쟁에만 골몰하던 조선은 이를 외면했다.

 

‘혈삼 무덤’과 ‘의마총’의 유래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후금에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이유길은 최후까지 싸웠다. 김응하의 결사적인 항전과 화살 한 발 쏠 수 없이 망가진 손가락을 보면서 이유길은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이에 입고 있던 한삼소매를 찢어 ‘三月 四日 死(3월 4일 죽다)’라는 글자를 써서 자신이 타던 애마의 갈기에 매어 주고 채찍을 쳐서 보낸다. 그리고 이유길은 이역 만 리 만주 땅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44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한편 피 묻은 한삼자락을 갈기에 맨 이유길의 애마는 진중을 빠져나와 산과 강을 건너 사흘 밤낮을 달려 마침내 집에 도착했고, 구슬피 울다 숨을 거둔다.

이에 가족들은 죽은 말의 갈기에 매어있던 혈삼(血衫)을 찾아낸 뒤 파주 광탄면 발랑리 선산에 이를 묻어 장사를 지내니 이것이 바로 시신 없는 ‘혈삼 무덤’이다.

이유길의 그 충성스런 말도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말 무덤’이라 불러 오다 ‘의마총(義馬塚)’이라는 묘지석을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

 

강홍립의 경우

만약에 인조반정이 안 일어나고 광해군이 그대로 권력을 유지했으면 어떠했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하지만 ‘명말청초’였던 당시의 시대 상황은 조선의 국운과 직결되는 중요한 변수였다. ·

그 옛날 대륙의 지배자로서의 당당했던 위엄은 간데없고. 반도로 밀려나 대륙의 눈치나 살피는 처지로 전락한 조선으로서는 그것이 숙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면 광해군이라는 외교의 달인이 있던 것이었으나 인조라는 어리석은 군주가 등극하면서 조선의 불행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후금과의 싸움에 출전, 거짓 투항함으로써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성사시킨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가족을 구금하라며 광해군에게 청하지만 들어주지 않는다.

출정 전 강홍립에게 비밀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청군과의 교전에서 궁사들로 하여금 화살촉을 뺀 빈 막대기를 활에 넣어 쏘도록 하여 명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조선의 입장을 청에게 알리도록 조치했다.

강홍립이 포로로 있던 1623년 4월 인조반정이 일어나 그를 총애했던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정권을 잡는다. 다음 해 일어난 이괄의 난 때는 반란을 주도했던,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해 강홍립 휘하로 들어온다.

이로써 조선의 정세를 읽은 후금은 1627년 1월,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한다. 정묘호란이다. 궁지에 몰린 조선은 강화를 제의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원치 않은 후금은 교섭에 응한다. 이때 막후에서 외교수완을 발휘한 인물이 바로 강홍립이었다.

 

조선의 명문가인 연안 이씨

정묘호란으로 강홍립은 마침내 8년 만인 1627년 귀국을 한다. 이에 서인 중심의 조정에서는 그가 항복한 것을 들어 그를 참수할 것을 주장하나 인조는 강홍립이 변발을 하지 않고 뜻을 꺾지 않았음을 들어 관직을 회복시켜준다.

그러나 귀국한 해인 그해 9월 강홍립은 병사를 한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명에 의해 후금에 투항했지만 인조반정으로 낙인이 찍힌다. 하지만 부차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는 충무공의 시호를, 명나라 신종으로 부터는 요동백을 추증 받는다.

이유길은 순조대에 이르러 충의공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이 된다. 일개 현령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사후에 재상 반열에 오른 것은 연안(延安) 이씨라는 문벌과 그의 조부인 이후백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조 때 광국공신 2등으로 연양군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된 문청공(文淸公) 이후백은 연안 이씨 최초의 양관(兩館,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이유길이 영의정에 추증되는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이시수와 대제학을 지낸 이만수 형제는 이복원의 아들로 부자 대제학이었다. 연안 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만 250명, 정승 반열의 상신 8명, 대제학 7명, 청백리 6명을 배출했다. 가히 조선의 명문가였던 셈이다.

 

▲ 이유길의 환생인가, 유허비각 앞에 우뚝 서있는 장한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저 소나무 심은 뜻은…

삼산면 충리 마을회관 옆에 이유길 유허비(해남군 향토유적 제1호)가 있다. 고종 30년(1893)에 건립된 것이다.

유허비의 전면에는 ‘황명심하순절본조증영의정겸세자사 충의공이선생유허비(皇明深河殉節本朝贈領議政兼世子師 忠毅公李先生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 첫머리의 ‘황명(皇明)’은 분명 명나라를 일컫고 있다.

조선의 장수가 되어 명나라를 대신해 순절한 공로로 이유길은 죽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에 추증됐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와 한 쌍의 당간지주가 있어 정승반열에 오른 충신 이유길의 사후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비각을 수호하듯 서 있는 장한 소나무 한 그루가 왠지 범상치가 않다. 누가 심었을까. 마치 이유길의 환생과도 같은 저 소나무를 심은 뜻은. 왕명을 받들고 전장에 나간 이유길은 장수로서 정직하게 싸웠다.

그것이 죽음의 길이란 것을 알면서도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지 않았다. 오직 충성. 그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독야청청(獨也靑靑)한 저 소나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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