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황사가 심하게 몰려온 날 오후. 매화꽃을 만나러 산이면 예정리에 있는 보해매실농원을 찾아갔다. ‘춘설(春雪)이 난분분하니’도 아니고, 하필이면 황사 낀 날이라니. 모처럼의 봄나들이가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과연 매화꽃을 만날 수는 있는 걸까. 뿌연 날씨를 의심하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따라 5리 남짓한 농원으로 접어든다. 매화마을로 유명해진 광양의 매화밭이 섬진강을 따라 가는 도로변에 노출된 것과는 달리 이곳의 매화는 마치 비밀의 화원을 찾아가듯 굽이굽이 찾아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길은 정겹다. 여유만 있다면 길을 걸으며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그런 길이다. 그 뿐인가. 가다 보면 절집도 만나고, 외갓집과 같은 정겨운 민가도 만나고, 배추밭도 만난다. 마지막으로 농원을 가리키는 입간판을 따라 우회전하면 이내 매화밭이다. 동백나무를 울타리 삼은 매화밭에 매화꽃이 지천이다. 매화세상이다. 그러나 황사를 동반한 모진 날씨 탓에 매화꽃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제대로 매화향에 실컷 취해보리라던 세속적인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간 셈이다. 그때였다. 이런 나를 위로라도 하려는 듯 익숙한 시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무릇 시인이라면 이 정도의 스케일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마저 좁은 땅덩어리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서야 어찌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최고가 아니면 차라리 남루라고 했다. 이왕에 세상에 나왔으면 그 정도의 호연지기는 필요한 법.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저항시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를 가장 탁월한 서정시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광야(曠野)’의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육사를 처음 만난 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청포도(靑葡萄)’를 통해서였지만 ‘광야’를 읽으며 그 장엄한 스케일에 순간 압도돼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독 진한 여운으로 오랫동안 맴돌던 시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방금 떠오른 네 번째 연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아하, 어쩜!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다? 매화향기…홀로…
춘설이 내릴 때 피는 꽃. 매화는 봄의 강한 생명력을 지닌 꽃이다. 이 강산 낙화유수(落花流水) 흐르는 봄에. 그 봄의 첫머리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는 사군자의 으뜸이다.
◆퇴계와 남명의 매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2~1571)은 매화를 무척 아꼈다. 평생 매화나무 바라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퇴계는 한양에서 늘 함께 했던 매화분을 낙향할 때 미처 챙겨가지 못하자 몹시 상심했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로 배편에 따로 그 매화분을 전해 받는 순간 재회의 기쁨에 시까지 지을 정도였다.
퇴계는 자신이 지은 매화시 91수를 모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또 매화나무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옛 선비들은 매화를 사군자의 으뜸으로 둘만큼 사랑했다. 자신의 매화를 함께 감상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퇴계는 이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일설에는 퇴계가 이처럼 매화를 가까이 한 것은 단양군수로 있을 때 만난 기생 두향(杜香)이가 정표로 준 매화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매화분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옆에 두고 함께 했으며 지금은 안동 도산서원 앞에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매화를 사랑한 퇴계를 단편적으로 전하는 일화가 있으니. 이는 그가 임종할 때 아들에게 일렀다는 다음과 같은 유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
퇴계는 이처럼 죽는 순간까지 매화를 사랑했다. 퇴계를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매화를 사랑한 것은 매화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다.
만물은 한그루의 나무와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그 이치를 가지고 있어 깊이 연구하면 속과 겉의 세밀함과 거침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는 것으로 그들은 매화를 통해 이를 실천한 것이다.
영남에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도 매화를 사랑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山天齋) 뜰에는 남명이 환갑을 맞은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남명매’다. 산천재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50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처사(處士)였던 남명의 그 올곧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 속에 오롯이 남아있는 것이다.
◆광양 매화마을, 그리고 임실
매화나무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에 있는 청매실농원 역할이 컸다. ‘홍쌍리 매실가’인 이곳이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면서 매실, 즉 매화는 봄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떠올랐다.
청매실농원은 매화나무 집단재배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다. 80년생 고목 수백 그루를 포함해 5만 평에 이르는 매화나무단지가 잘 조성돼 있다. 또 매실식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전통옹기 2000여 개가 농원 뒤편에 왕대숲과 함께 어우러져 분위기를 돋운다.
청매실농원은 백운산 자락이 섬진강을 만나는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농원 중턱에 서면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너머로 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 악양들판이 동양화처럼 내려다보인다. 섬진강가의 산마다 매화나무가 많이 자라 저마다 꽃을 피워내지만 청매실농원만큼 풍성한 곳도 드물다. 가히 화엄세상이다.
‘매실명인’인 홍쌍리가 본격적으로 매화농원을 조성해 오늘날 매화마을로 알려진 데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시아버지 율산 김오천이 척박한 산에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은 오랜 노력의 결과다.
1930년대 일본에서 밤나무는 식량대용으로, 매화나무는 약용을 목적으로 들여온 율산은 그 넓은 야산에 밭작물을 심지 않고 나무를 심어 주위 사람들로 부터 일을 벌인다고 ‘오천이 아니라 벌천’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거름을 하고, 나무를 가꿔 오늘의 청매실농원 기틀을 마련했다.
율산이 수만 평의 땅에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농장의 터를 잡자 며느리인 홍쌍리는 매화나무를 늘리고 종자를 개량해 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홍쌍리는 정부지정 명인 14호로 지정될 만큼 매화와 매실에 관해서는 일가를 이루고 있다.
청매실농원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매화꽃은 세 가지. 하얀 꽃에 푸른 기운이 섞인 청매화, 복숭아꽃처럼 붉은 빛이 나는 홍매화, 그리고 눈이 부시게 하얀 백매화이다. 열매는 꽃과는 달리 빛깔에 따라 청매, 황매, 오매, 백매, 금매로 나뉜다.
청매는 수확하기 직전의 초록색으로 여문 매실을 말한다. 황매는 청매가 더 익어 노란색을 띤 매실이며 오매는 껍질을 벗긴 뒤 씨를 발라낸 청매를 찹쌀벼의 볏짚 위에 올려 불을 지피면 연기에 그을려 까만 오매가 된다.
이밖에 백매는 청매를 농도가 옅은 소금물에 하루 정도 살짝 절인 뒤 햇빛에 말린 것이고, 금매는 청매를 수증기에 찐 후 햇빛에 골고루 말린 것이다.
또 다른 매화의 숨은 명소로 전북 임실 구담마을이 있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은 ‘안담을’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의 매화는 무공해 매화다. 섬진강 상류인 이곳은 공장은커녕 식당 하나도 없는 청정지역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덕치면은 한지로 유명하다. 자연적으로 자란 닥나무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한지원료다. 마을을 가로 질러 흐르는 회문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맑고 깨끗해 한지가 제 빛깔을 냈다고 한다. 120년의 역사를 가진 닥나무 가마솥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곳 예정리에 매실농원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78년 보해양조가 국내 최대 규모인 약 14만평의 농원을 조성하고 매화나무 1만4500주를 심으면서다. 매화꽃이 만개하는 3월이면 매실농원 전체가 하얀 눈밭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화꽃이 만발해 꽃대궐을 이룬다.
농원에서는 매년 이맘때면 일반인들에게 농원을 개방하고 있다. 땅끝 매화축제도 열린다. 올해로 여섯 번째다.
보해매실농원은 영화 ‘너는 내 운명’과 ‘연애소설’에서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펼쳐진 장소로도 유명하다. 매화 외에도 이름 모를 야생화가 분홍색 꽃을 피워 하얀 매화꽃과 조화를 이룬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이 곳 만의 매력포인트다. 이러한 매화의 매력에 반한 관광객들의 재방문이 이어지면서 한해 평균 20여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곳의 매화는 백매화를 주종으로 홍매화와 청매화, 남고, 백가하, 앵숙 등 다양한 종류의 매화가 농원 전체를 뒤덮으며 장관을 연출한다. 이외에도 10여종이 넘는 야생화와 동백 등이 매화와 한데 어우러져 완연한 봄기운을 선사한다.
그러나 천혜의 자연적인 여전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매화는 왠지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농원과 인근마을과의 부조화 때문일 것이다. 농원을 벗어나면 여느 농촌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매화는 오로지 매실농원의 주주일 뿐. 주변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광양이나 임실의 매화만큼 감동적이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농원 안에서만큼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한 동백나무 사이로 펼쳐지는 매화밭은 상상 그 이상이다. 다만 매화밭을 벗어나는 순간 매화밭의 감동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 황사 때문이었을까? 맑은 날을 기약하며 내 눈에 초조해진 꽃들과 작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