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선생은 여그 우리 집에 살며 소설을 썼지라.” 황석영은 해남읍 수성리 고정옥 할머니집 방 한칸을 얻어 소설 장길산을 썼다. 올해 83세인 집주인 고정옥 할머니는 ‘황석영’이 이곳에서 ‘장길산’을 썼다는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003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친구와 함께 수성리 길을 걸어갈 때 그가 말했다.

“저기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는 집이 소설가 황석영이 살던 집이라네.”

황석영(黃晳暎)이 해남에 머물며 대하소설 ‘장길산(張吉山)’을 집필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친구로부터 그가 살았다는 집을 전해 듣고 보니 왠지 그 집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친구의 집을 들를 적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 집을 보곤 했는데 오랜만에 찾아가니 집이 보이질 않는 거였다. 집터에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고. 느티나무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낭패였다. 친구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지난해에 집을 허물고 원룸을 지었다고 현장을 확인해준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이웃집에 수소문을 해보니, 집주인 할머니로부터 황석영을 안다는 뜻밖에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황 선생은 여그 우리 집에 살며 소설을 썼지라.”

이야기인즉 자신의 집 천장이 너무 낮아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할머니네 집 방 한 칸을 얻어 그곳에서 소설을 썼다는 것이었다. 올해 우리나이 83세인 집주인 고정옥 할머니는 ‘황석영’이 이곳에서 ‘장길산’을 썼다는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황석영이 기거하며 소설 장길산을 집필했던 단칸방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다

할머니는 오래된 일임에도 황석영에 대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석영이 아랫집을 300만 원에 사서 이사를 온 것부터 시작해 남매가 있었고, 아내가 밥을 지어 날랐으며 군불을 때고 싶다는 말에 연탄보일러를 없애고 아궁이를 만들어준 일과 한학에 밝았던 당신의 시아버지와 각별히 지냈고, 그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황석영이 장지인 강진 도암면까지 따라갔다는 이야기며 5년을 살다 광주로 이사를 갈 때 남편이 소금 한 가마니를 선물로 줘 보냈다는 매우 구체적인 기억까지 들려주는 거였다.

이쯤해서 황석영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전라도 해남으로 내려간 것이 76년 봄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노골화해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1호에서 9호까지 선포된 때였다. 당시에는 ‘민중’이니 ‘현장’이니 하는 논의가 각계에서 일어났고 많은 청년들이 공장과 농촌으로 하방하기도 했다. 그때의 시골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오늘날에 와서는 공과가 드러난 셈이지만, 어쨌든 전국 구석구석까지 독재를 강화하고 산업화를 위한 노동력과 저임금을 뒷받침해주는 기지를 관리하는 수단이었다. 중소농은 몰락하고 빈농과 소작농은 시골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내가 갔을 때만 해도 해남의 일개 면에서 버려진 빈 집이 구십여 호나 될 지경이었다.’

황석영은 해남으로 내려와 살면서 시인 김남주와 최권행 등을 만나 사랑방농민학교를 시작한다. 그게 1년 만에 해남농민회로, 그리고 전국적인 농민회로 발전했고, 광주로 가서는 김남주, 문병란 등과 ‘민중문화연구소’와 같은 문화운동조직을 만들어서 전남 지역 일대에서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들이 80년대 민족운동연합으로 확산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고정옥 할머니는 황석영이 해남에서 5년을 살다 광주로 이사를 했다고 들려줬다. 그러나 황석영은 1978년 겨울 광주로 이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해남에 내려온 것도 1976년 봄이라는 기록과 가을이라는 기록이 있다) 광주로 온 황석영은 윤한봉과 ‘현대문화연구소'를 발족시킨다.

당시 광주에는 ‘양서조합’이라고 책을 읽고 보급하는 운동, 민주청년협의회, 여성들로 구성된 백송회 등이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황석영은 극단 ‘광대’를 만들고 문화운동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현장문화운동을 시작하는데 그때가 1979년 겨울이었다.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 5월부터 정국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들이 계속 열렸고, 황석영도 집회에서 선언문을 쓰고 낭독도 하면서 주동자로 찍혀서 구속되기도 한다. ‘장길산’이 연재 도중에 여러 차례 중단된 이유다. ‘장길산’으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임꺽정’을 넘어서겠다는 것이 황석영의 생각이었다. 그런 까닭에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감옥에 갇혀 집필을 했다는 벽초를 생각하며 황석영은 작은 위안을 삼는다.

광주에 살면서 문화 운동에 몰두하던 황석영은 극단 ‘광대’와 ‘현장’ 문화 운동의 근거지가 될 소극장 개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극장 공사에는 돈이 필요했다. 서울에 돈을 받으러 갔는데 그 날이 5월 16일, 금요일이었다. 갔더니 오후라 은행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월요일까지 기다려주면 안되겠냐고 해서 서울에 남았다. 운명의 날인 5월 18일로부터 비껴 서게 된 이유다.

황석영은 광주의 긴박한 상황을 전해 듣고 당장 내려가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만류를 한다. 지금 광주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도 없지 않느냐, 이곳 서울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설득에 서울에 남아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황석영의 아내였던 홍희윤(필명 홍희담으로 광주항쟁을 그린 ‘깃발’의 저자)은 항쟁의 중심에서 싸우고 있었다. 황석영이 광주 집에 전화를 해서 위험하니 집에 있으라 했더니 평소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의 홍희윤은 “당신이 사람이야?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하며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었다.

황석영은 ‘장길산’ 연재가 끝나던 1984년부터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리는 일에 나선다. 광주항쟁의 자료들을 모은 원고를 정리하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 작업을 하면 위험할 것 같아 자료를 들고 서울로 올라와 3개월 동안 정리를 해서 책으로 펴내는데 그 기록이 바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다.

◆김남주와의 추억

“김남주는 해남에 앉아서 유럽의 혁명사를 얘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가 나고 자란 농촌의 정서와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 문물을 접한 모던함을 겸비한 사람이었지.”

해남에서 김남주와 함께 농민운동을 하던 황석영의 회고다. 농촌운동을 하면서도 김남주는 자신의 활동에 불만을 가졌다. 재야, 학생, 노동자들이 힘겹게 반 유신 투쟁에 나서고 있는 데 한가롭게 농민운동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황석영에게 지하신문을 발행해서라도 박정희 정권과 싸워야 한다고 신문발행을 제안한다.

투쟁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김남주에게 황석영은 광주로 나가게 되면 그런 준비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도 해남에서 뜨뜻미지근한 일을 하면서 참다운 싸움을 기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시민적인 지식인 나부랭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김남주는 불의 사나이였다. 가슴에는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용암이 되어 들끓고 있었다. 싸워야 한다, 독재와 분단세력과 농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열정이, 사명감이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김남주는 해남에서 한동안 황석영과 죽이 맞아 잘 어울렸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였던 파격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비록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해남에서의 구체적 문인으로서는 최초의 인간적인 결합인 것이었다.

◆황석영, 김남주에게 편지를 쓰다

내가 초라한 가산을 트럭에 때려 싣고 76년의 가을, 우슬재를 굽이굽이 돌아 넘었을 제 멀리 저 아래쪽에 해남읍이 잃어버린 고향처럼 저녁노을에 물들어 있었지. 그리고 고개 옆에는 유신독재 시대의 상징이었던 새마을 구호와 함께 반공 표어가 적힌 선전탑이 뻔뻔스럽게 서 있었다.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라고 말이야. 나는 그 때 트럭의 운전수 옆자리에 앉아 그 표어를 읽으면서 낄낄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유머라도 있었다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해남에 살게 되면서 해변의 어느 국민학교 앞을 지나다가 시멘트 담벼락에 쓴 붉은 페인트 글씨를 보고는 나는 다시 소스라쳤다. ‘찢어 죽이자, 공산당!’ 동백이 고운 꽃봉오리를 부끄러운 듯이 감추고 있는 학교 앞에는 어린이들이 밝은 목소리로 떠들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붉은 페인트의 선명함과 폭력성에 소름이 끼치던 게 생각난다. 이곳이 내가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돌다가 닿게 된 너와 나의 해남이었다. -중략-

사나운 바람이 불어 우리 시골 집 뒤란의 400년 묵은 느티나무가 파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떨던 밤에, 우리는 식민지 시대와 6.25의 아수라장을 허덕거리며 오직 생존하여 왔던 부모들의 얘기며 집안 얘기를 했고, 유년시절에 배웠던 어딘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을 때리는 듯한 노래들을 나직이 불러봤지. 그런데 남주 너는 언제나 반음씩이 틀려서 나중에 너희 후배들도 틀린 노래를 전파시키고 말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들은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이라든가, ‘엘레나로 변한 순이’ 같은 흘러간 노래들이었지.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광주로 나가서는 너는 날마다 같은 노래만을 불렀다. ‘가난한 마을에 자라난/ 농노의 아들딸아/ 악독한 원수와 싸움에/ 동무가 되었구나...’하는 노래였다. 내가 가사를 적어주고 가르쳐 준 노래 중에서 유독 그 노래만을 너는 틀리지 않고 불렀다.

해남으로 내려 온 까닭은

고정옥 할머니는 황석영을 ‘키 크고 인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글을 쓰다 밖으로 나오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하곤 했다는 것이다. 황해도 옹진이 고향인 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월남해 서울에서 같은 실향민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해남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외가가 평양인 황석영으로서는 할머니네가 마치 가족과도 같았으리라.

대개 글 잘 쓰는 사람은 말이 어눌한데 황석영은 ‘글발’과 ‘말발’이 모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슷한 연배의 소설가 최인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황석영을 꼽기도 했다. 또 황석영은 문단에서 ‘황구라’로 불릴만큼 뱀장수 사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뿐만이 아니다. 곱사춤은 공옥진이 울고 갈 정도로 탁월한 것이어서 술판을 질펀하게 주도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노는 모습만으로는 영락없는 한량이라, 장길산의 저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가 공병우 박사에게 혼쭐이 났다는 일화는 문단에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황석영은 어떻게 해서 해남으로 내려왔을까. 한국일보 사주였던 장기영의 요청으로 1974년 7월 11일부터 신문에 ‘장길산’을 시작하면서 황석영은 도회지 출신으로서 많은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농촌과 전통 사회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가 그런 이유로 선택한 곳이 바로 해남이었다. 통신수단이 열악했던 시절 신문연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원고를 제대로 보낼 수 없을 때는 우체국에서 전화로 불러주곤 했다.

광주 항쟁과 맞물려 문화운동을 할 때는 이 도시 저 도시로 도망 다니다시피 떠돌았는데 그 때마다 이름 모를 시민들이 원고를 한국일보까지 배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골탕을 먹는 건 문화부 기자들이었다. 원고 때문에 혼쭐이 난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소설가 김훈은 아직까지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정도다.

 
◆‘장길산’에 대한 최소한의 오마주

‘장길산’은 1984년 7월5일 2092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현암사에서 전 10권으로 출간된다. 원고지 2만 매, 파지 만 해도 6만 매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1980년대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함께 대학생 도서대출 순위 수위를 다퉜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대작이다. 그러나 ‘태백산맥’의 경우 소설의 무대였던 보성군 벌교읍에 문학관을 건립하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건물을 재현해 놓음으로써 문학순례코스로 조성해놓은데 비해 ‘장길산’을 집필했던 해남군에는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전무한 실정이다.

더욱이 작가가 살았던 가옥마저 사라진 지금 집필실이 있던 고정옥 할머니네 집에 ‘장길산’을 기념하는 안내판을, 그리고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자주 만났던 서림공원에 문학비라도 건립해 기념하는 것이 해남군이 ‘장길산’에 보내는 최소한의 오마주는 아닐는지. 할머니 댁 툇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면서 그가 호탕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황석영은?

194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태어난 황석영은 해방 후 평양을 거쳐 월남, 영등포에 정착한다. 경복고를 자퇴하고 가출해 남도지방을 방랑하며 출가를 결심하지만 1962년 ‘사상계’에 단편 ‘입석부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67~69년)을 했으며 해남·광주에서 현장문화운동을 하다가 광주항쟁을 겪는다. 황석영은 그 후 1989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북을 한다. 이 때문에 5년간 베를린·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한 뒤 1998년 귀국해 5년간 복역했다. 대표작으로 ‘객지’,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장길산’, ‘무기의 그늘’, ‘손님’, ‘바리데기’ 등이 있다.

이해덕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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