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운 최치원의 창건설화기 깃든 천년고찰 화원 윤거산 서동사, 대웅전 뒤편으로 동백과 비자나무로 조성된 숲이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집들을 다니다 보면 창건한 스님의 대개가 원효나 의상대사, 또는 자장율사이거나 도선국사인 경우를 보게 된다. 그 분들의 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동서남북 가히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창건했다는 절집이 화원에 있다. 그야말로 천년고찰 서동사(瑞洞寺)다.

화원면 금평리 절골(寺洞)에 있는 서동사는 고려시대 골짜기마다 암자가 들어서 한때 80여 동의 대가람을 이뤘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한 시절 절골은 해남의 불국토였던 셈이다. 이 절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최치원이다. 유불선에 두루 통달했고.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와 같은 금석의 명문이 전하고는 있지만 절집까지 지었다니.

최치원과 관련한 사찰인 경북 의성의 고운사도 창건은 의상대사가 했고, 최치원이 머물며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래로 절 이름을 고운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전북 김제의 귀신사 역시 의상이 창건한 절로 최치원이 머물며 ‘법장화상전’이라는 책을 편찬한 인연이 있을 뿐이다. 최치원 또한 부산의 해운대의 유래가 된 것을 비롯해 전국구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곳 화원반도에 와서 창건설화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자못 외경심마저 드는 것이다.

◆서동사는 백제시대 사찰?

최치원만큼 삶이 극적인 인물도 드물 것이다. 성골과 진골만이 왕위에 오르던 골품제 사회에서 중앙귀족인 6두품 출신으로 12세의 나이에 당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고운은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다.

귀국을 해서는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돼 외교 문서의 작성을 도맡았으며, 진성여왕 때 ‘시무 10조(時務十條)’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는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변방의 태수로 전전하던 고운은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속세를 떠나 은거한다. 일설에는 가야산 홍류동에서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고운이 고군산열도의 선유도에서 태어나 당나라 상인에 의해 입당했다는 설과 전북 옥구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말하자면 호남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신안군의 비금도와 우이도에도 고운과 관련한 샘이 있어 당나라를 오가면서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운이 서동사를 창건했다고는 하지만 주지인 정양(正良)스님은 창건이 아닌 ‘터를 잡았다(開基)’는 설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스님은 서동사가 고운 보다 훨씬 앞선 백제시대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생각은 불교가 도래한 영광 법성포가 있듯, 화원반도에는 당과 왕래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당포(唐浦)가 있음을 근거로 든다. 화원면 월호리 당포마을이다.

지금도 서동사 인근의 밭에서 광범위하게 절터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백제시대 불교가 들어올 때 당포를 통해 이곳에도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경내에 오층석탑이 있었으나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돼 시대를 고증할 수 있는 유물이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석탑이라도 남아있으면 양식으로 대략적인 연대 추정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전남도 기념물인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숲

대흥사나 미황사가 대중적인 인지도 높은데 비해 서동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내력이 오래된 절집이다. 최치원의 창건설화로 대략 유추해 봐도 천년을 넘긴다. 고운의 창건설화를 근거로 할 때 그가 당포로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해남으로 들어 왔을 것이다. 전하는 바로는 고운이 화원에서 7년간 머물렀다는 이야기고 보면 앞서의 선유도 출생설과 관련해 해남 거주설을 주장한들 어떠하겠는가.

오래 전 고운이 천령군(지금의 경남 함양군) 태수로 있을 때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 상림을 들른 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이라는 상림은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된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조경에 관한 한 탁월한 고운의 안목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서동사에도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숲이 있다. 대웅전 뒤로 한껏 운치를 자아내는 이 숲은 그 가치가 인정돼 전남도기념물 제245호로 지정됐다. 고운과 함양 상림을 근거로 혹시 서동사의 나무들도 고운의 이러한 내력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웅전 뒤편으로 조성된 동백나무와 비자나무숲은 서동사의 숨은 보물이다. 크고 작은 동백나무는 총 140여 그루로 가슴높이 직경이 40~45cm 가량이고 크기는 4~6m로 생육 정도도 비교적 양호하다. 비자나무 노거수는 큰 것은 가슴높이 직경이 75~80cm, 크기는 12~18m에 이른다. 서동사 동백나무 비자나무숲은 수령 및 식생분포로 보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해 숲을 지속적으로 보존 관리할 필요가 있어 전남도 기념물 제 245호로 지정됐다.

▲ 서동사에 보관돼 내려오는 칡북,칡으로 만든 북으로 대략 300년 가량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인 목조삼존불과 ‘칡북’

서동사의 보물은 다름 아닌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715호)이다. 서동사 목조불상은 17세기 불상조각 연구와 금칠을 해서 보수하는 개금중수(改金重修)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석가ㆍ약사ㆍ아미타여래가 공간적 삼세불 형식을 취한 이 삼불좌상(三佛坐像)은 17세기 중엽 전라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운혜(雲惠)스님이 우두머리 화가(조각가)인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제작했다. 이들 세 불상은 효종 1년(1650)에 만들었다가 순조 4년(1804)에 개금중수됐다.

불상과 관련된 기록은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 불상의 복장물 도난과정에서 화산(華山)스님에 의해 수습된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에 남아 있다. 이 발원문에 의하면 석가여래삼불상은 스님과 평범한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옥보(玉寶)스님의 증명(證明) 아래 운혜를 비롯한 8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효종 1년 겨울에 조성을 마쳤다고 한다.

불상의 중수는 이 보다 154년 뒤인 1순조 4년에 이뤄졌고, 풍계순정(楓溪舜靜)을 비롯한 19명의 승려화원들이 참여하여 개금을 했다. 이 불상을 조각한 운혜는 17세기 전반기 중후한 맛의 선 굵은 조각을 구사했던 수연(守衍)의 조각 전통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고, 17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자리매김한다.

목조삼존불 못지않게 관심을 가진 것이 이곳에 남아있는 ‘칡북’이다. 칡으로 만든 북으로 대략 300년 가량 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북은 정유재란 때 칡으로 백성들을 구휼했다는 데서 절 이름이 한때 ‘갈천사(葛天寺)’로 불렸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칡북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1730년 무렵 목관(牧官) 강필경(姜弼慶)이 부임해와 동헌에 북통을 만들 때 칡넝쿨이 진상되었다는 것이다.

서동사 칡북은 원통형의 나무에 구멍을 뚫고 양쪽에 가죽을 대어 만들었다. 북은 나무의 원형을 따라 만든 탓인지 북의 모양이 다소 삐뚤어진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지름이 약 50cm 가량인 이 칡 북은 나무의 안쪽을 파고 만들어 굉장히 큰 칡 나무가 사용됐음을 짐작케 한다. 북통으로 칡을 이용했다는 소재의 희귀성을 감안하더라도 문화재적인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 보물 제 1715호로 지정된 서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맞배지붕의 단출한 대웅전의 소박미

절 앞 일주문에는 ‘윤거산 서동사(輪車山 瑞洞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반적으로 운거산(雲居山)으로 알려졌는데 윤거산이라니? 궁금증은 정양스님의 설명으로 풀렸다. 어느 고승이 이곳의 산세를 보고 ‘부처님의 법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이어질만한 곳’이라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해서 윤거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서동사의 본사인 대흥사가 있는 곳이 두륜산(頭輪山)임을 비춰볼 때 윤거산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동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로 있다.

서동사의 자세한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절에 보관되었던 범자다라니경(梵字陀羅尼經)및 1980년대 초 현 대웅전의 지붕 보수 때 발견된 ‘서동사중수상량문’(1870)과 ‘서동사중수서’(1870) 현판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연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서동사의 창건은 확신할 수 없으나 통일신라 진성여왕 (887~896)때 최치원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이후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병화(兵禍)로 모두 소실된 것을 1779년에 복구하였다가 다시 약 90년 후인 1780년 의윤(宜胤)스님이 주축이 돼 정기(正己), 진일(賑一) 등 3인의 스님이 발원, 중수했다고 한다.

다라니경판은 철종 9년(1858)에 만들어졌는데 끝부분에 보면 월여(月如)스님이 1858년 9월 화원목장(花源牧場)의 서동사에서 수명과 복덕을 기원하는 ‘다라니경’을 조성, 간행한 것으로 되어있다. ‘서동사중수서’를 보면 1870년 당시 대웅전의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24년,1945년과 1946년에 청학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했다. 현재 서동사는 대웅전·종각·요사 건물과 함께 최근 복원된 누각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간 경사진 지형을 3단으로 정지하고 단에 대웅전과 요사를 배치했다. 또 서동사에는 ‘상용권공문(常用勸供文)’이라는 책이 전한다. 책 끝부분에 현종 15년(1849)에 해당하는 연도가 적혀있어 ‘범자다라니경목판’보다 시기가 빠른 고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서동사 대웅전(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은 소박한 느낌을 준다. 법당 앞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어 여느 정겨운 한옥과도 같다.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전각으로 지붕은 익공양식의 맞배지붕이다. 내부는 통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윗면이 평평한 막돌 초석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뒤 그동안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고, 최근에는 1990년에 보수를 했다.

◆문화재 발굴 조사 이뤄져야

입춘과 설이 지나 계속된 비가 봄비인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온이 떨어지고 함박눈이 내리다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눈발이 제법 흩날리는 날 서동사를 찾아갔다. 봄날같은 날씨에 속아 꽃망울을 터뜨렸던 동백은 난데없는 눈보라에 놀라 설동백이 되었다. 한사코 방으로 들라는 정양스님의 채근을 굳이 사양하며 툇마루에 앉으니 귀한 거라며 오디발효차를 내 오신다.

편안한 미소가 인상적인 주지인 정양스님을 보고 있으려니 영락없는 서동사의 모습을 닮았다. 지금까지 절집을 다니면서 이처럼 환대를 받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스님의 바람은 폐사가 돼 흩어져 있는 서동사 인근에 대한 문화재 발굴 조사를 해보는 것이다.

혹시라도 서동사의 내력을 밝혀줄 무슨 단서가 묻혀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길을 서둘러야겠다. 좋은 날 다시 찾아오겠노라 인사를 남기고 총총히 산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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