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호걸풍의 장수가 격정을 인내한 듯한,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누구냐 넌?

장판교(長坂橋)에서 단기(單騎)로 조조(曹操)군과 마주 선 장비(張飛)의 모습이 이런 얼굴은 아니었을까. 유비(劉備)의 아들 아두(阿斗)를 품에 안은 조자룡(趙子龍)이 조조 군의 포위를 필사적으로 뚫고 장판교를 향해 말을 달렸다. 이때 다리 입구에서 장비가 장팔사모를 꼬나 잡고 조자룡에게 외쳤다. “자룡은 어서 가시오. 뒤는 내가 맡겠소.” 자룡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고 다리를 홀로 막아선 채 조조의 군대와 맞선 장비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하후걸을 향해 벽력같이 일갈했다.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아!” 이에 크게 놀란 하후걸은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을 보고 있으면 호걸풍의 장수가 격정을 인내한 듯한,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화면을 가득 메운 파격적인 얼굴. 그림의 실체와 제작 경위를 놓고 학계는 그동안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눈에 보이는 것만큼 보고 느끼면 그만인 것을.

 

◆고산이 후손들을 위해 터를 잡다

공재가 말년을 살던 고택(중요민속자료 제232호)이 현산면 백포(白浦), 또는 백방포(白房浦)로 불리는 마을에 있다. 공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일컬어지는 인물. 이 고택을 지은 사람은 공재의 증조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다. 여기에는 이러한 일화가 전한다.

보길도에서 배를 타고 백포만으로 들어오던 고산은 마을의 형국을 보고 당대에 자신이 살기에는 안 좋아도 후손들이 번창할 수 있는 길지로 보고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큰아들 인미(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할 요량이었지만 백포만의 바닷바람이 심해 결국은 포기하고, 녹우당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고산이 처음 이 터에 집을 지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의 고택은 상량문으로 볼 때 현종 11년(1670)에 지은 것이다. 1670년은 고산이 죽기 1년 전으로 후에 공재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과 고종 9년(1871)에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집을 지을 당시에는 문간채와 사랑채 등 48칸 규모였으나, 지금은 안채 13칸과 곳간·헛간·사당 등이 남아있다.

고택은 본래 녹우당과 같이 ㅁ자형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안채는 ㄷ자형의 용마루에 작은 합각이 있는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동쪽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했다.

또한 사랑채 앞마당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사당 옆으로 별묘사당도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공재의 고택은 일제강점기 때 화재로 원형을 많이 잃어 버렸다. 그 전까지는 고가들이 빽빽이 둘러쳐진 대 전택 이었다고 한다. 공재 고택은 안채의 남쪽 중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현재 안쪽 중간문은 구조가 변경된 상태인데 이곳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면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북쪽 편에 나있는 부엌을 시작으로 안방, 그리고 강당형식의 3칸 대청이 나온다. 그 옆으로 방, 곳간 등이 이어져 있고 부엌 뒤편으로는 헛간이 있다.

 

▲ 윤두서는 46세(1713)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백포리 고택에서 2년을 살다 녹우당으로 돌아가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 앞에 소철을 심은 뜻은

백포 마을 앞으로는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고산이 바다를 막아 간척한 땅은 지금은 훨씬 넓어진 모습이지만 예전에는 마을과 바다가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공재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기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고택은 해풍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은 형식을 하고 있다.

또한 처마는 홑처마 지붕으로 연목만 걸고 있고, 대청마루 위의 가구는 자연스럽게 약간 굽은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구성하여 장여와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고택은 안채의 평면구성, 두리기둥과 구부러진 퇴보나 대들보의 견실한 결구, 부엌의 앞쪽 툇마루를 찬마루로 이용한 점 등에서 이 고가만의 특징이 나타난다.

사당은 안채의 오른쪽 위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 바로 곁에는 별묘사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곳 사당의 벽면에는 민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사당은 안채의 뒤에 있지 않고 헛간에서 대문으로 나가는 왼쪽에 두었다. 안채의 뒷자리가 협소하거나 지형이 낮을 때에는 이와 같이 안채에서 보아 동쪽을 상징하는 왼편에 두는 때문이다. 사당을 오르는 돌계단 오른쪽엔 소철이 서있고, 왼쪽 담장은 예의 담쟁이덩굴이 덮고 있다. 사당 앞에 소철을 심은 예는 드문 일인데, 소철은 이 고장에서 비교적 잘 자라고 게다가 ‘강한 사랑’을 상징한다 하니 조상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내기에 좋은 소재로 보기도 한다.

 

◆공재의 애민정신이 깃든 곳

 

백포마을은 공재의 애민정신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인 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공재는 해남 연동에서 고산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고산의 넷째 아들인 예미(禮美)의 아들 이구(爾久)의 넷째 아들이 공재다. 그러나 종손인 이석(爾錫)이 후사가 없자 고산의 후손가운데 점괘가 가장 좋은 공재를 입양했다고 한다.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종손이 된 공재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한양에서 양부인 이석을 뵈러 해남으로 내려갈 때 양모인 청송 심씨가 공재더러 향장(鄕莊)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에 채권을 본 공재는 그 액수가 수천 냥이 되었으나 빚을 진 사람들이 가난하여 빚을 갚을 수 없자 채권을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에서 그가 주민들의 구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정 많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재는 조선 후기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해남 연동에서 학문과 서화에 몰두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공재는 시· 서· 화는 물론 음악 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 천문 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공재의 제문(祭文)에 자신의 형제가 공재로부터 배웠고,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아쉬움을 적어 공재의 박학다식함을 추모하고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재의 외증손자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1713)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백포리 고택에서 2년을 살다 녹우당으로 돌아가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재의 묘는 고택 옆 크라운제과 창업자인 윤태현(공재 9대손) 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망부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있다.

해남윤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481호인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는 그의 대표작품 ‘자화상’을 비롯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등이 들어 있다. 그의 또 다른 걸작 ‘노승도’, ‘심득경초상’, ‘출렵도’, ‘우마도권’, ‘심산지록도’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백포마을에 대한 김지하의 회상

1980년대 해남으로 내려와 살던 시인 김지하는 김동섭(해남종합병원 전 이사장)을 비롯한 해남의 절친한 아우들과 함께 백포마을을 찾았다. 그의 백포행은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에 실려 있다. ‘해남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나가면 강진 쪽과 땅끝 쪽 길이 갈라지는 곳 부근에 백포마을, 또는 백방포 마을과 함께 그 뒷산인 백방산이 우뚝 서 있다.

본디 섬지방과 제주, 그리고 중국으로 가고 중국에서 오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으며 섬으로 귀양길 떠난 인사의 가족이 귀양 풀리기를 기다리며 머물던 집들, 장사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는 지어미들이 묵었던 집들, 여각들, 객주집들이 즐비한 포구였다. 그리고 뒷산 백방산은 머언 섬이나 중국에서 돌아오는 가족을 기다려 먼 눈을 주던 아낙들이 서 있던 백방산 봉우리와, 지아비의 귀양 풀릴 날만 기다리다 도리어 죽음의 소식을 듣고 절망한 아낙들이 몸을 던졌다는 ‘나가미(落岩)’가 있는 산이다.

아우들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던 내 가슴에 왠지 모를 깊은 한, 풀 길 없는 슬픈 정한(情恨)이 사무쳐오던 일을 도무지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일제 때에 간척을 해서 포구는 없어진 지 오래요. 논만이 무연한 벌판에 백방산만 우뚝 솟았을 뿐 마을도 적막한데 어디서 그렇게 짙고 뿌리깊은 정한이 우러나와 내 가슴에 깊이깊이 저며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를 묻고 있는 내 눈을 의식한 동섭 아우가 다만 한마디,

“쩌그 저 나가미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들이 솔찮이 많은 갑디다.”

아하! 한(恨)이로구나!

한이 서렸구나!

두타산 무릉계의 저 시커먼 원한의 그늘과는 또 다른 새하얀 고독과 인생유전의 슬픔이 내 가슴에 기이한, 기이한 눈부심을 남기고 있었다.’

▲ 백방산은 머언 섬이나 중국에서 돌아오는 가족을 기다려 먼 눈을 주던 아낙들이 서 있던 봉우리와, 지아비의 귀양 풀릴 날만 기다리다 도리어 죽음의 소식을 듣고 절망한 아낙들이 몸을 던졌다는 ‘나가미(落岩)’가 있는 산이다.
 

◆도모리 패총과 나주 임씨 정려

백포마을 앞 두모포(斗毛浦)는 두모리~가차리간 간척지가 생기기전까지는 섬이었다. 말을 닯은 섬이라 하여 ‘말섬’이라고 불렀다. 두모리 패총(향토유적 제5호)은 백포만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두모 마을 뒤편 해안의 남서쪽 경사면에 패각층 단면이 노출돼 있다.

두모리 패총은 해남에서 가장 이른 후기 신석기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이곳에서 즐문토기편, 무문토기저부, 적갈색경질토기 등이 수습됐다. 두모리 패총은 신석기로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에 이르는 오랜 기간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송지면 군곡리 패총과 함께 해남의 대표적인 패총유적이다.

해남의 선사시대는 두모리 패총을 남긴 신석기시대 후기의 즐문토기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점차 내륙으로 들어가 강 언덕이나 후미진 바다기슭의 언덕으로 퍼져 청동기 시대가 되면 3∼4개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전 지역에 걸쳐 90여군 9백여 기의 지석묘를 남기게 된다. 이들이 다음 시대인 철기시대에 보이는 마한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위건국(素謂乾國)의 기반세력들이다.

해남지역은 2002년 목포대학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산이면 구성리·덕송리·대진리, 문내면 충평리, 화원면 성산리 등지에서 몸돌, 소형양면 찍개, 긁개, 여러 면 석기, 돌창 등 20여점이 수습됐다. 이것들은 구석기 중기(4만∼12만 년 전)와 후기(1만∼4만 년 전)에 보이는 유물로 제주도와 일본 지역에 전파된 구석기문화를 규명할 자료로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이로써 해남 최초 인류는 후기신석기(3∼4천 년 전)인 현산 두모리 패총보다 빠른 약 10만년 이전의 원시시대로 상향 조정이 가능하게 됐다.두모리 한 길가에 나주 임씨 정려(향토유적 제13호)가 있다. 효부였던 나주 임씨의 덕성을 기리기 위해 어사 성수묵의 특명으로 고종 3년(1866) 중건된 비각이다.

 

◆쇠락해져가는 백포마을 고가에 대한 아쉬움

백포마을 입구 서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인상적이다. 느티나무 앞에서 바라보는 백포마을안길은 한낮인데도 인적 없이 고즈넉하다. 마을에는 공재 고택과 함께 주위로 여러 채의 고가들이 있다. 고가를 에워싼 높다란 돌담을 따라 걸어본다.

폐가로 남은 집도 여럿인 것 같다. 인기척이 사라진 고가는 을씨년스럽다. 이내 발길을 돌려 백포만을 바라다 본다. 바람이 불어온다. 입춘의 바람이다. 한 시절 백포 마을 집집마다 ‘입춘첩’이 나붙었으리라. 떠나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풍속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고향에 대한 향념(向念)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향념이 누항(陋巷)에 뒹구는 포의(布衣)라고 해서 다르고. 당상(堂上)의 금의(錦衣)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어디 고향에 비길손가. 쇠락해져가는 백포마을의 고가를 바라보니. 부질없는 상념만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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