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에 대흥사에서 당대의 고승인 완호(玩虎)스님에게 법(法)을 받은 초의는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또 22세 때부터는 전국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삼장(三藏)을 배워 통달했다.

일지암(一枝庵)은 초의(草衣, 1786~1866)선사가 홀로 ‘다선일여(茶禪一如)’를 생활화하기 위해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짓고 살던 암자다. 초의는 일지암을 짓기 훨씬 전에 금강곡(金剛谷)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주변은 병풍바위가 우뚝 솟고, 맑고 찬 물이 흘렀으며, 온갖 나무가 무성했다. 다만 대나무만 없는 것이 서운해서 적련암(赤蓮菴) 곁에 있던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초의가 일지암을 짓기 전에 거처했다는 금강곡의 초암(艸菴)은 1823년에 지은 시에서 알 수가 있다. ‘금강골 바위 위에서 언선자와 함께 왕유의 종남별업 시에 화운하다(金剛石上與彦禪子和王右丞終南別業之作)’. 이 시는 금강골에서 철경 스님와 함께 왕유(王維)의 ‘종남별업(終南別業)’시를 빌려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바람을 노래한 것이다.

 

◆‘가지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네

일지암에서 초의는 40여 년 동안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을 했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했다. 일지암은 ‘언제나 저 뱁새를 생각하노니/ 한 가지(一枝)만 있어도 몸이 편하다네’라는 그 유명한 당나라 때 전설적인 은자(隱者)인 한산(寒山)의 시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무릇 다인(茶人)이라면 한번쯤 순례해야 할 차의 성지(聖地)가 됐다.

‘장춘동(長春洞)은 두륜산의 지맥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룬 곳이다. 이곳에 초당을 지으니 일지암이다. 세 칸 초당에는 초의스님과 동자 한 사람 뿐, 법상(法床)에는 부처님을 모셨다. 아침의 목탁소리와 샘물소리, 댓잎 스치는 바람소리는 거문고 소리와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수(石澗水)는 대나무로 받아 찻물을 끓인다. 남은 물은 연못에 흐르게 하고 연못 위에는 나무 시렁을 만들어 포도 넝쿨을 올렸다. 정원 주변도 괴석(怪石)으로 꾸몄다.’

‘일지암 시집’의 서문이다. 이렇듯 일지암을 세심하게 꾸몄음은 초의가 조경과 화훼에 남다른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다. 무욕의 초탈한 분위기 속에서 차의 오묘한 경지를 깨달은 초의는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썼고. 이는 진실로 그가 우리 차에 바친 지고지선의 공양은 아니었을까.

 

◆초의의 출가와 관련한 일화

흔히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는 정조 10년(1786) 전라도 무안현(지금의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장의순(張意恂). 5세 때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던 스님이 건져줘 살아났다. 그 스님이 출가할 것을 권했고, 15세에 인근 남평 운흥사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출가한다. 그러나 신헌(申櫶, 1810~1888)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는 초의의 입산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국조 중엽 이래로 교강(敎講)이 성해지고 선강(禪講)이 시들해졌다. 똑똑한 자는 오로지 교학(敎學)에만 힘을 쏟아, 글 뜻이나 지루하게 풀이하고 훈고나 하려 들며, 학구(學究)가 되어 경전으로 살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멍청하고 답답한 무리들이 만년에는 모두 수좌로 일컬어진다. 의순은 이를 병통으로 여겨, 배움이 이루어지자 이를 버리며 말했다. “무당 할멈이 우리 부모를 그르쳐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으니, 이미 한 차례 죽은 셈이다. 또 누가 능히 목을 꺾고 고개 숙여 책 속으로 나아가 좀벌레로 죽고 반딧불로 마르게 하겠는가?” 이에 책 상자를 뒤져 여러 소(疏)를 초한 것과, 풀이를 베껴 쓴 것을 죄다 불살라 버렸다. 다만 ‘선문염송집’과 ‘전등록’ 2부와 한산과 습득의 시 각 1권, 고려 진정국사 천책의 시 등 모두 몇 권만을 취하여 동학들과 더불어 작별하고, 해남현 두륜산 속으로 가서, 넝쿨과 바위가 쌓인 가운데 집 한 채를 얽고서 일지암이란 편액을 달았다.’

초의의 출가가 무당의 요설에 부모가 미혹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 점이 흥미롭다. 또 일지암으로의 입암(入菴) 동기를 교종이 성하고 선종이 쇠미해진 교단의 상황과, 가짜 돌중들이 엉터리 공부로 저마다 수좌를 일컫는 풍조를 혐오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도 초의가 특별히 선택한 몇 종의 책 가운데 한산과 습득의 시집이 포함된 것을 본다.

19세에 대흥사에서 당대의 고승인 완호(玩虎)스님에게 법(法)을 받은 초의는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또 22세 때부터는 전국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삼장(三藏)을 배워 통달했다.

 

◆법호를 ‘풀옷’으로 지은 뜻은

일지암(一枝庵)은 고요하고 정갈했다. 초의가 입적한 뒤 불에 타 사라졌던 일지암은 초가 한 칸, 기와집 한 칸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초의는 39세 되던 해인 1824년 이 암자를 지은 뒤 입적할 때까지 반평생을 이곳에 머물렀다.

‘연못을 파니 허공중의 달이 훤하게 담기고/ 마음의 낚싯대 드리우니 까마득히 구름 샘에 닿는구나/ 눈을 가리는 꽃가지 잘라내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았던가’.

초의가 암자를 짓고 난 뒤 지은 시에서 그의 안빈낙도(安貧樂道) 하는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일지암 마당에 서면 두류산의 모든 봉우리와 암자는 물론 멀리 달마산까지 정겹게 다가온다.

‘초의’라는 법호에도 선사의 무소유 수행관이 깃들어 있다. 이 법호는 고려조 야운(野雲) 선사의 ‘자경문(自警文)’ 중 ‘나무뿌리와 과일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솔잎과 풀옷으로 벌거숭이 알몸을 가린다’는 글귀에서 인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초의의 무소유 수행은 만년으로 갈수록 강도를 더했다. 제자 각안(覺岸) 스님이 쓴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이런 모습이 기록돼 있다. ‘선사는 입적하기 한 해 전 일지암에서 토굴(용마암)로 옮겼다가 다시 움막(쾌년각)으로 이거해 삶을 마감했다.’

초의는 시, 그림, 글씨에 능한 삼절(三絶)이었다. 또한 탱화와 단청, 범패, 바라춤에도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선승이었다.

 

▲ 초의가 입적한 뒤 불에 타 사라졌던 일지암은 초가 한 칸, 기와집 한 칸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초의는 39세 되던 해인 1824년 이 암자를 지은 뒤 입적할 때까지 반평생을 이곳에 머물렀다.
◆일지암 ‘유천’의 물맛을 극찬한 추사의 부친

초의의 인생관이 구석구석 배어있음인지 일지암은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진도 사람 속우당(俗愚堂)이 쓴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菴序)’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다. 과수원은 뒤쪽에 가꾸고 채마밭은 앞에다 만들었다. 맑은 물 한 줄기가 바위 사이로 솟아 채마밭 앞으로 남실남실 흘러나온다. 채마밭 곁에 연못 하나를 파서 물길을 이끌어 아래로 흐르게 하니 차고도 맑은 품이 금곡(金谷)만 못지않다. 못 위에는 나무 시렁을 설치해서 몇 그루 포도 넝쿨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양옆의 흙 계단에는 기화이초를 심어 봄빛을 희롱하니 마치 속세 사람을 비웃는 듯하다.’

차를 달이는 일지암의 물맛은 각별하다. 초가 뒤편에 크기가 다른 물받이 돌 3개를 놓고 반으로 쪼갠 대나무를 연결해 물이 흐르게 해놓은 ‘유천(乳泉)’의 물맛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 젖과 같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지암에 들러 유천의 물맛을 보고는 “소락(酥酪)보다 더 좋다”고 극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초의는 암자 옆 산자락에 차나무를 심어 가꿨다. 직접 찻잎을 따서 덖고 말리고 비벼 차를 만든 뒤 자신도 먹고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차나무를 키우고 차를 만들어 마시는 모든 과정을 선 수행의 하나로 여긴 것이다.

오늘날 일지암을 찾는 사람들은 으레 잘 가꿔진 차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차밭은 없다. 차 문화의 중흥조를 낳은 성지에 차밭이 없다니. 초의 생전에 차나무를 많이 재배했을 것으로 보여 대흥사 주변 산자락을 뒤져봤지만 자연 상태로 방치된 곳이 일부 있을 뿐. 규모 있는 차밭은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음암과 진불암 가는 길섶에서 겨우 발견한 차밭은 잡풀이 뒤덮여 차나무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차에 대한 공납 요구가 늘어나면서 농민과 승려들이 견디다 못해 차나무를 없앤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차 이야기

차는 중국의 삼황오제 중 의약의 신인 신농(神農)씨가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는 전국시대의 명의 편작(編鵲)에 의한 기원설, 선종의 창시자 달마(達磨)에 의한 기원설 등이 전해진다. 여하튼 차를 마시는 습속은 빠르게 확산되어 당나라 시대에는 차문화가 보편화되었다. 이 시대에 당나라의 시인 육우(陸羽)가 차의 기원과 생산지, 마시는 방법 등 차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다경(茶經)’을 집필하여 다도의 체계를 세웠다. 오늘날에도 육우의 ‘다경’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차나무를 식물분류학적으로 나누면 크게 온대지방의 소엽종(중국종)과 열대지방의 대엽종(앗삼종)으로 나뉜다. 중국종은 대개 쓰촨(四川)성의 내륙지방을 원산지로 본다. 일부에서는 보이차로 유명한 윈난(雲南)성 푸얼시라고도 한다. 푸얼시에서 멀지 않은 구이저우(貴州)성 동부의 전위안(鎭沅)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 공식명칭은 ‘천가채(千家寨) 1호 고차왕수(古茶王樹)’. 2001년 세계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이 고차왕수의 수령은 무려 2700년이나 된다.

차가 점점 더 알려지자 수요가 증가했으며 다른 지역으로의 판매를 위해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 길이 바로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유명해진 ‘차마고도(茶馬古道)’다. 차마고도는 중국 윈난성·쓰촨성의 차와 티베트 지역 말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지역의 교역로다.

한편 차는 9세기 이후 종자를 통해 한국과 일본으로도 전파된다. 이로써 한·중·일 세 나라에 차문화가 퍼지게 됐다.

우리나라에 차 종자가 처음 파종된 것은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당 문종으로부터 차 종자를 받아 귀국하여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 한다(‘삼국사기’ 권10 흥덕왕조). 김대렴이 차 씨앗을 처음 심은 시배지(始培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골짜기라는 설과 전남 구례군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이라는 설이 지금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끽다거’로 만나는 선의 경지

중국의 선승 조주(趙州)선사는 수행자가 찾아오면 언제나 이와 같이 물었다.

“혹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차 한 잔 마시게.”

또 한 수행승이 찾아왔다.

“혹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네, 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차 한 잔 마시게.”

와 본적이 있어도 ‘차 한 잔’, 와 본적이 없어도 ‘차 한 잔’이었다. 이 쯤 되자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는 유명한 화두가 됐다.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있듯 선승들에게 차는 일상이다. 그 일상은 ‘있다’와 ‘없다’의 상대적 사유를 초월한 일상이며, 그것은 곧 평상심, 무심인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조주가 그랬고 초의 또한 그러했다. 선사가 내미는 이 ‘한 잔의 차’를 무심(無心)하게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마실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나오는 길에 만난 초의의 상(像)이 내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여보게. 차나 한 잔 하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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