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수영이 있는 문내면 선두리 오래된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객터미널 못미처 ‘강강술래길’로 이름 붙은 표지판과 함께 법정 생가가 나온다. 법정이 태어나 우수영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대학 1학년 때였다. 무슨 과목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20대 후반의 여자 시간강사였는데 첫 수업시간에 칠판에 ‘무소유’ 세 글자를 써놓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선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당시 책은 문고판으로 나와 있었는데 순수의 시대를 동경했던 내게 그것은 적어도 하나의 울림이었고. 수업이 끝나는 길로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새롭다. 법정 스님. 그를 이야기 할 때면 으레 ‘무소유’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만큼 그의 출가행은 욕심 없는 청빈한 삶의 모습이었다. 무소유는 대중에게 개인적인 성찰과 깨달음을 주었다. 하지만 법정이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소유가 아니었다. 법정은 ‘갖지 아니하는 삶’이 아닌 ‘나누는 삶’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은 ‘함께하는 삶’, 즉 ‘불이(不二)’라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삶으로 모든 만물을 수평관계로 보았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가지거나 지배할 수 없으며 베푼다는 말 또한 옳지 못하다고 했다.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 그것이 법정이 추구한 최고선의 가치였다.

 
◆오래된 골목길에서 만나는 오래된 집

우수영이 있는 문내면 선두리 오래된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객터미널 못미처 ‘강강술래길’로 이름 붙은 표지판과 함께 법정 생가가 나온다. 법정이 태어나 우수영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골목길의 여느 집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색 함석지붕을 인 오래된 생가는 단출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곳을 ‘무소유의 성지(聖地)’라 불러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것은 바로 법정의 생가라는 사실, 그 하나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 집 앞에서 그가 출가 전 사유하며 걸었을 골목길을 돌아다본다. 출가하기 전에 법정은 박재철(朴在喆)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재철은 어머니와 함께 목포로 건너가 당시 6년제이던 목포공립상업중학교(목포상고, 지금은 목상고)로 진학한다. 목포에서의 생활은 교우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던 시기였다.

그러나 전남대 상대를 다니던 때 일어난 6.25는 청년 재철을 깊은 우울 속으로 가두고 만다.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처참한 전장을 목격하면서 그는 끝없는 번민을 거듭했다.

“난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해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심경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어란 말인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의 시간을 겪으며 마침내 재철은 출가를 결심한다. 전남대 상대 3학년이던 1954년 싸락눈이 내리던 동짓달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출가를 결심하고 길을 나선 재철은 오대산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전쟁통에 입적한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의 선풍이 오롯이 남아있는 오대산은 청년 재철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대산 행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지만 때마침 폭설로 길이 묶이는 바람에 안국동 선학원에 잠시 몸을 맡기게 된 재철은 그곳에서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을 만난다.

그리고 효봉과의 만남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청년 재철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된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으로 나가 종로통을 한 바퀴 돌았었다.”

 

◆‘절구통 수좌’로 불리던 스승 효봉 스님

조계종 초대 종정인 효봉 스님은 ‘절구통 수좌’로 불릴 만큼 장좌불와(長坐不臥) 용맹정진으로 유명한 선승이다. 효봉의 속명은 이찬형. 평양 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판사생활을 하던 찬형은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난 뒤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고민하다 어느 날 출근길에 집을 떠나 엿판을 메고 3년간 전국을 엿장수로 떠돈다.

정처 없이 떠돌던 찬형은 드디어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금강산 도인’ 석두(石頭)스님에게 계를 받고 머리를 깎는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6개월 정도는 행자생활을 해야 머리를 깎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찬형에게 석두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었고. 이에 찬형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연이어 “몇걸음에 왔는가”라는 석두 스님의 물음에 찬형은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았다. 이에 석두 스님은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고 탄복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元明)이란 법명을 내린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머리를 깎은 효봉 스님은 이후 무섭게 정진하였는데, 엉덩이 살이 헐고 진물이 나 방석과 들러붙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1930년 법기암에서 크게 깨달은 스님은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꼬/흰구름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누나’하고 오도송을 읊으며 토굴벽을 박차고 뛰어나온다.

◆통영 미래사에서 부목으로 일하다

효봉의 제자로는 시인 고은이 있다. 고은은 1952년 일초(一超)라는 법명으로 출가를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효봉 스님6)의 제자가 된다. 경남 통영 미륵도 미래사에서 보낸 스승과의 생활은 행복했다. 10여 명의 제자 가운데 맏상좌가 구산(九山, 1909∼1983) 스님이었고, 고은과 박완일(일관, 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 중간, 그로부터 두세 번째 아래가 법정이었다.

“우린 토굴문중이었다. 하루 한 끼 먹으며 철저히 수행중심으로 살았다. 스승은 겸손하고 온화했다. 목소리도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새벽 3시 기상시간만은 추상같았다. 쩌렁쩌렁 맹수소리로 잠을 깨웠다. 날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생일을 기억했다가 국수와 떡도 해줬다.

‘오늘은 국수 먹기 좋은 날’이라며 만들게 하곤, 나중에 ‘네놈 귀빠진 날’이라고 알려줬다. 어느 꽃피는 봄날, 일렁거리는 춘심에 내 젊음이 폭발했다. ‘부처가 되면 뭐 하냐’며 선방의 구들장을 뜯어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자 스승은 ‘맞다! 그거 돼서 뭐 하냐, 잠이나 자자’며 벌렁 드러누웠다. 한방 크게 얻어맞았다. 난 울면서 구들장을 다시 가져다놓고 잘못을 빌었다.”

고은의 자전적 소설인 ‘나, 고은’에 나오는 스승 효봉과 통영에서의 수행담이다.

미래사에서의 법정의 소임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이었다.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법정은 지리산 쌍계사로 들어가 정진한다. 이어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한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법정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다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한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한 법정은 1975년 8명이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한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지내다 열반에 이른 법정의 삶은 그가 생전에 소망한대로 ‘말고 향기로운’ 것이었다.

◆숱한 베스트셀러를 쓴 법정의 필력

법정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었다.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또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생전에 법정은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법정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자야’라는 이름으로도 불림)으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시주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그러나 법정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법정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동안 풀어 논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하여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

눈부신 어느 봄날. 새로 피어난 꽃과 잎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느냐고 묻던 법정은 저마다 이 험난한 생을 살아오면서 가꿔온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보길 바란다고 했다. 법문에서 “봄날은 간다. 덧없이 간다”고 말문을 연 그는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피어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듣길 바란다”고 마치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법정의 삶을 추적한다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끊임없이 나누며, 버리고 떠난 청빈의 삶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은 아니었을까. 싸락눈이 내리는 날 찾아간 법정의 생가는 너무도 조용했다. 한 시대의 큰 스승이 나고 자란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한 생가지만, 그것은 아마도 탈속한 법정을 닮았는지 모른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던 날. 그는 구도의 길을 찾아 묵묵히 눈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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