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봉은 옥천면 대산리 원경산 부근에 ‘만취당’과 ‘옥산서실’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옥산서실은 원래 옥천면 대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현재 송산리에 사당과 옥봉 강당을 세웠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8~1583),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로 추정).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 송나라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한시에 있어서 송시풍(宋詩風)을 따랐으나, 이러한 풍조를 배격하고 당시(唐詩)를 주로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정사룡(鄭士龍)·박은(朴誾)·박순(朴淳) 등이 이러한 당시풍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두드러지게 일파(一派)를 형성한 것이 박순의 제자였던 이들 ‘삼당(三唐)’이었다. ‘삼당’은 서정적인 시를 쓰려 했으며 성조(聲調)를 중시했다. 이런 경향은 옥봉과 고죽이 전라도 출신이고, 손곡 역시 충청도로 호남이라는 점에서 지역적인 영향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세삼절’ ‘일문사문장’으로 불리던 옥봉의 집안

옥봉은 장흥에서 태어났다. 그가 옥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5세 무렵. 정응서가 열고 있던 옥산초당으로 온 것이 계기가 됐다. 그 후 청백리인 박순과 호조판서 이후백, 대사성 양응정 문하에서 수학한 옥봉은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를 살다간 영의정 노수신에게도 학문을 익혔다. 옥봉은 27세에 부친의 권유로 과거를 치러 진사가 되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시인의 길을 걷는다.

이쯤해서 문장으로 일가를 이룬 그의 집안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791~817)에 비견되는 옥봉으로부터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진중에서 활약한 둘째아들 송호(松湖) 진남(振南 1564~1618), 병자호란 때 의병이 되어 싸운 손자 상빈(尙賓 1594~?)에 이르기까지 삼대시인 가문으로 명성이 높아 ‘삼세삼절(三世三絶)’이라 일컬었다.

그 뿐이 아니다. 옥봉의 맏형인 광홍(光弘)은 ‘관서별곡’의 저자로 유명하고, 둘째 광안(光顔), 사촌 광성(光城)이 모두 특출해 이들을 일컬어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이라고 한다. 또한 옥봉은 문장에 뛰어나서 이이, 송익필, 최립, 최경창, 이달, 하응림, 이산해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렸다. 또 장흥군 안양면 기산마을에 ‘팔문장 시가비’가 있는데 옥봉을 비롯해 기봉 백광홍, 남계 김윤, 서곡 임분, 죽곡 임회, 동계 백광성, 풍잠 백광안, 지천 김공희 등을 ‘기산팔현(岐山八賢)’이라 하며 ‘기산팔문장’으로도 부른다.

 

◆고죽과 홍랑의 사랑 그리고 손곡의 삶

사대부들이 송시(宋詩)를 써서 정략적으로 이용하자 삼당은 당시(唐詩)로 백성들의 삶을 노래했다. 그러나 옥봉을 비롯해 이들의 삶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옥봉과 동문수학한 영암 출신인 최경창은 기생 홍랑과의 애절한 사랑으로 유명하다. 고죽은 34세 되던 가을에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러 함경도 경성으로 가던 길에 홍원에 들렀다 그곳의 관기 홍랑을 만난다. 홍랑은 절세가인으로 문학적인 재능마저 뛰어나 이내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경성에서 세간의 비난을 무릅쓰고 2년 가까이 함께 살며 깊은 정을 쌓는다. 임기를 마친 고죽이 경성을 떠날 때 홍랑은 함관령에 이르러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건넨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를 본 듯 여기소서’ 이별하는 정인에게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절양(折楊)’의 풍속은 중국에서 이별을 뜻하며 재회를 기원하는 증표였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가 고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게 된 홍랑은 경성을 출발해 한달음에 한양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때는 명종의 비 인순황후 국상 중이었고. 관기를 데려와 산다는 소문이 나면서 고죽은 파직된다.

나중에 고죽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있는 파주로 찾아가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홍랑은 얼굴에 상처를 내고 세수도 않은 채 뜨거운 숯을 삼켜 스스로 목소리와 노래를 잃고 수절 하다가 죽는다. 홍랑이 죽자 정성에 감동한 문중에서 고죽의 묘 아래에 홍랑을 장사 지내주었으니.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 절개를 지킨 홍랑의 사랑이 아름답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이들의 사랑을 기려 지난 2004년에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에 고죽관을 건립했다.

허균(許筠)의 스승으로 알려진 이달은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관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詩文)으로 달랜 이달은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은거한다. 말년에는 허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가르쳤는데, 특히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장인이 된 정응서와의 만남

▲ 옥천 송산마을 입구에 세워진 옥봉 백광훈 유허비

신분제 사회에서 시(詩)는 지배계층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삿갓을 눌러 쓰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정처 없이 떠돌던 ‘방랑시인’ 김삿갓은 파격적인 풍자시로 세상을 한껏 조롱했다. 그런데 방랑시인의 대명사 김삿갓보다 300년가량 앞서 유랑문학의 운치와 전통을 싹틔운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옥봉이다.

옥봉 일가는 연산군 때 귀양을 내려온 조부 백회 때부터 장흥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러다 옥봉이 다섯 살 때 옥천면 대산리 옥산초당을 찾아 정3품 부위(副尉) 벼슬을 지낸 정응서의의 문하에 들어간다. 나중에 장인이 되는 정응서와의 만남은 옥봉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옥산초당에서 공부한 지 1년 반 가량이 지났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옥봉은 글방을 나서다 문득 시 한 수를 읊는다. ‘잘 있거라 뜰 앞 가득한 나무들아(好在庭萬樹) / 꽃 피는 봄이면 다시 돌아오리니(花開又一來)’ 간결하고도 세련된 시를 지은 여섯 살 시인의 천재성을 스승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명종 5년(1549) 스승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간 옥봉은 열셋 나이에 진사초시를 가볍게 통과한 뒤 박순, 이후백, 양응정 등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을사사화의 후유증으로 뒤숭숭했다. 지각 있는 선비들은 정계에 나가는 것을 꺼리고 유랑을 하거나 술독에 빠져들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의리요, 풍류였다. 옥봉 또한 과거시험을 제쳐두고 괴나리봇짐을 걸머진 채 구름처럼 명산대찰을 떠돌았다.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울분을 진한 붓 끝에 담아내니. 이는 김삿갓에 앞서 유랑시인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옥봉은 스무 살에 혼인을 하지만 신부는 고작 2년 만에 저세상으로 가고. 어렸을 때 스승인 정응서의 딸과 스물네 살에 재혼을 한 옥봉은 옥천면 대산리 원경산 부근에 ‘만취당’과 ‘옥산서실’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이때 뒷산 봉우리 이름인 ‘옥봉(玉峰)’은 그의 호가 된다. 이어 스물일곱 살이던 명종 10년(1564)에 옥봉은 부친의 권유로 진사시험을 통과하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는다. 대신 ‘팔문장’들과 글로써 교류를 한다.

‘팔문장’과 더불어 옥봉은 정철, 서익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특히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와의 우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백호가 누군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에 이르러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을 따르며 시를 지었다는 풍류남아가 아니던가. 둘은 말 한 필로 함께 유랑을 하면서 하루씩 번갈아가며 주인과 마부 행세를 했다. 열두 살 아래 백호가 주인이 될 때면 옥봉은 진짜 마부가 된 듯이 굽신거리며 주인을 섬길 정도로 격의 없고 자유롭게 지냈다고 한다. ‘격외(格外)’의 삶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옥봉과 나주 출신인 임제, 그리고 최경창의 교류를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선조 5년(1571) 유배에서 풀려나 대제학으로 있던 노수신은 옥봉을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으로 천거한다. 사신을 수행하며 글벗과 말벗이 되어주는 중요한 임무였다. 옥봉은 사신들에게 즉흥시 한 수를 지어 보인다. ‘성 위의 날아가는 까마귀 모두 돌아가려 하는데(城上飛鴉歸欲盡)/ 자리 주위에 흐르는 강물은 무정하게 흘러가네.(席邊流水去無情)’ 시를 본 사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럴만도 했다. 이미 성당(盛唐)시인 이백과 두보의 경지에 도달한 옥봉이 아니었던가.

 

◆선조마저 슬퍼한 옥봉의 죽음

‘옥봉집’에는 모두 504 수의 시가 실려 전한다. 옥봉의 아들 진남이 대흥사에 의뢰해 ‘옥봉집’ 목판본을 만든 것이다. 옥천면 송산리 옥봉서실에는 옥봉사당과 함께 그의 유물이 전시돼 있는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에는 9종 113점이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돼 송산리 유물관에 소장돼 있고 지난 1981년에 지어진 사당도 이곳에 있다.

옥봉의 시는 순간적으로 포착한 삶의 한 단면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수와 비애가 전체를 관통하는데 만남과 이별, 인생무상 등의 정서를 읊은 시는 애틋하고 다정하다. ‘옥봉집’에는 벗과의 우정에 관한 시가 유난히 많은데 동문수학한 고죽을 그리며 쓴 시 20여 수가 전한다.

결혼 이후 옥봉과 고죽은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다 고죽은 북변으로 남쪽으로 고을살이를 전전했고, 백광훈은 실의의 낙향 등으로 길이 늘 엇갈렸다. ‘호서길 가고 나면 호남길인데(湖西路盡湖南路)/ 천리 산하에 병든 몸일세(千里山河一病身)/ 낡은 여관 등불 없이 비바람 치는 밤(古店無燈風雨夜)/ 지나온 반평생이 옛 사람에 부끄럽다(半生形影愧前人)’

매번 벼슬을 사양하던 옥봉이었지만 가난에 지친 식구들을 위해 마흔한 살에 선릉 참봉이 되어 서울로 가던 길에 마침 남원군수가 주최한 시회(詩會)를 보게 된다. 함께 길을 가던 아들 진남이 시 한 수를 지으니 칭찬이 자자했다. 지금 남원 광한루에는 옥봉과 송강이 지은 찬시(撰詩)가 한 서판에 나란히 게시돼 있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벼슬을 살던 옥봉은 예빈시 참봉겸 주자도 감조관을 역임하고 소격서 참봉이던 1582년 5월에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자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옥봉의 죽음을 슬퍼했다.

선조 또한 옥봉의 죽음을 몹시 애석하게 여겨 친히 영여(靈與)를 하사하고 율곡을 장례관으로 임명한다. 율곡은 서울에서 전라도까지의 운구 행렬을 직접 관장했고.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송강도 해남까지 운구를 도왔다. 그해 9월 옥봉의 유해는 해남 북평면 동해리 해림산 중턱에 안장됐다. 매년 송산세사(松山世祀)에서 춘분제를, 그리고 음력 10월 6일에 묘전시제를 올리고 있다.

 

아들 송호 백진남의 경우

옥산서실은 옥봉과 그의 아들 송호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송호는 해남 윤씨와 혼인을 해 삼산면 송정리에 송호정이란 정자를 짓고 별서로 삼았다. 정자에 들러 시를 남긴 인물로는 옥봉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비롯해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오산 차천로, 청음 김상헌, 월사 이정구, 삼연 김창집, 북헌 김춘택 등으로 정자주인의 인물됨을 알 수가 있다.

송호 또한 옥봉을 닮아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야인의 서예가요 시인의 삶을 살았다. 송호는 부친인 옥봉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옥봉집’을 간행했으며 옥천면 송산리에 사당과 옥봉강당을 세웠다. 송호의 삶은 옥봉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곳 옥산서실을 중심으로 가히 ‘청산별곡’의 청빈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자연은 옥봉과 송호의 삶과도 닮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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