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유일의 화원철비, 흉년에 구휼미를 풀어 기근을 면하게 해준 어사 정만석의 은공을 기려 세운 영세불망비다.

내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철비(鐵碑)는 경북 울진과 봉화를 잇는 십이령(十二嶺), 열두 고갯길에 있는 보부상 불망비다. 십이령은 동해 바닷가 마을인 경북 울진 흥부 장터에서 하당을 지나 두천을 거쳐 크고 작은 열두 고개를 넘어 영남 내륙인 봉화 소천장으로 이어지는 ‘미역과 소금의 길’이다. 두천에서 산길로 들어서서 울진쪽 바릿재~평밭~느삼밭재~너불한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를 지나 봉화 땅인 고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150리 산길이다. 이 길은 꼬박 3일 낮밤을 걸어야 했다. 얼마나 고단한 사역인가. ‘등금쟁이’라 불리던 보부상들은 이러한 수고를 덜기 위해 노랫가락을 장단삼아 넘어 다녔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가노.’ 앞선 지게꾼이 선소리를 대면 뒤따르는 일행들은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하는 후렴구로 받아넘겼다. 십이령의 두 번째 고개인 바릿재 초입에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가 서있다. 1890년대에 내성(지금의 봉화읍) 사람으로 봉화 소천장을 좌지우지하던 보부상 우두머리 반수(班首) 권재만(權在萬)과 접장(接長) 정한조(鄭韓祚)의 은공을 기려 세운 철비(鐵碑)다. 일제 때는 공출을 피하려 땅에 묻었다 해방 후 캐냈고. 6.25때도 땅에 묻고 피란 갔다 돌아와 다시 꺼내 세웠다 한다.

 

 
◆ 흉년에 구휼해준 은공 기려 건립

오석(烏石)에 새겨진 비석에 익숙했던 내게 십이령 철비는 낯선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남에도 이러한 철비가 있다니. 화원면 청룡리 복지회관 앞에 있는 ‘어사 정만석 영세불망비(향토유적 제18호)’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는 철비와 함께 8기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있다. 말 목장이었던 화원면의 당시 감목관(監牧官) 선정비다. 해남에서 유일하게 남은 철비는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린 주민을 구휼해준 암행어사 정만석(鄭晩錫, 1758~1834)을 기려 조성했다.

1795년 을묘년에 정만석이 암행어사로 해남 땅을 밟았을 때는 100여년 만에 닥친 큰 흉년으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해남현감 정간은 탐욕스런 자였다. 또 현감의 총애를 받고 있는 아전과 장교들은 마음대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학대하는 등 비리가 만연했다. 그 길로 관아에 출두한 정만석은 현감과 아전들을 모두 불러들여 꿇어앉히고, 구휼과 세금징수에 관한 장부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현감은 자신에게 해가 될 만한 서류들을 미리 모두 없애버린 뒤였다.

정만석는 몇날며칠에 걸쳐 모든 장부를 샅샅이 살피고 창고의 물품들을 대조한 결과 마침내 해묵은 비리들을 밝혀낸다. 현감은 콩 400석을 거둬 돈으로 바꾼 뒤 이 중 절반만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 반을 착복했다. 뿐만 아니라 구휼미를 거짓으로 보고하고 빼돌린 쌀만 1000석이 넘었다. 구휼장부는 뇌물을 받고 구휼대상자를 고치는 바람에 남자가 여자로 바뀌고 숫자에도 차이가 많이 났다. 정만석은 당장 현감을 파직시키고 창고를 봉했다. 그리고 현감이 훔친 쌀 300석을 풀어서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굶주림에서 벗어난 주민들은 한결같이 정만석을 칭송했다. 감동한 주민들은 집집마다 수저와 젓가락, 쇠붙이 등을 모아 영세불망비를 세웠으니 그것이 지금 남아있는 이 철비다.

철비의 뒷면에는 ‘갑인 5월일(甲寅五月日)’이란 명문이 있는데 갑인년은 1794년으로 정만석이 해남에 온 1년 전이므로 이 철비는 60년 뒤인 185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는 이곳에 있던 4기의 철비 또한 공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정만석의 은공을 잊지 못해 이 철비를 목숨 걸고 지켜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철비와 좌대만 남은 1기가 남아있다.

 

◆ 평안도에서는 생사당도 지어줘

정만석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호는 과재(過齋) 또는 죽간(竹磵)이다. 정조 7년(1783) 생원시와 증광문과 병과에 합격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됐고. 1785년 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한 후 1794년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그해 양근·가평 암행어사가 된 뒤 호남(1795)·호서(1796) 암행어사로 명성을 떨쳤다. 그 후 병조·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한 후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정만석의 암행어사로서의 뛰어난 관찰력과 꼼꼼한 기록정신은 홍경래의 난을 조사한 결과를 기록한 ‘관서신미록장계’에 잘 드러나 있다. 1811년 정만석은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조사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관서 위무사’에 임명된다. 정만석은 난리에 연루되어 잡혀온 백성들을 조사하고 그 내용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으로 당시 백성들의 생활모습과 풍속, 산업 발전 등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정만석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때에도 변함이 없는 것이어서 그는 죄인들을 공명정대하게 다루고 상처받은 백성들의 마음을 잘 어루만졌다. 이에 평안도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지어서 그의 은공을 기렸다.

평생 청렴결백했던 정만석은 후손들에게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묘비 2기와 호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산신석 등이 배치돼 있다. 그동안 화원주민들은 이 비에 제사를 모셔왔으나, 20여 년 전부터 온양 정씨 후손들이 봄 시제 때 제를 모시고 있다. 이 비는 본래 인근 신덕리에 있던 것을 199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 곳곳에 남아있는 그밖에 철비들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도 철비가 서있다. 원풍정 앞 모정 저수지변에 세워진 이 철비는 영암에서 유일한 것으로 마을주민들이 저수지 소유권을 놓고 선산 임씨 후손들과 소송을 벌여 승소한 뒤 전라도 관찰사이던 김병교의 명판결을 기념하여 1857년에 세운 영세불망비다.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는 여느 철비와는 다른 ‘학계(學契)’비가 있다. 숙종 10년(1684)에 서당을 운영하기 위해 창립한 학계의 운영에 관한 비로 1714년에 건립됐다. 앞면에 학계참여 인명(11명)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으며 뒷면에는 학계에서 구입한 재산목록을 기록했다. 이를 통해 학계 창립이후 1714년까지 30년간 25필지 1.7결의 재산을 모은 것을 알 수 있다.

동계(洞契)등에서 서당을 운영하거나 교육활동을 부수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칠전리에서 보듯이 향촌에서 사학 교육기관인 노암재(露岩齋,서당)를 세우고 학계를 설립하고 재원을 갹출해 학전(學田)을 만든 뒤 이를 영속하도록 철비를 세운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따라서 이 철비는 300여 년 전 도서벽지 사람들의 교육열을 보여주는 기념물로 평가받을 만 하다. 특히 석비가 아닌 철비를 주조해 세운 점에서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비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연구와 오지벽촌의 교육사 연구 및 사회변화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다.

경남 거제시 기성관 경내에는 무려 6개의 철비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울진군의 4기 보다 많은 것으로 지자체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은 숫자일 것이다. 이밖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한글로 된 철비가 있다. 2011년 10월 경남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표충사 입구에서 한글로 새긴 철비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는 고종 14년(1877) 거창 군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공적을 세운 김계진(金啓鎭, 1823~1881)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대부분의 철비처럼 글씨는 음각으로 주조했고 뒷면에는 건립연대를 양각으로 주조했다. 특이한 점은 뒷면에 한글로 새겨진 '긔뫼동지달일립'이 거꾸로 새겨졌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기묘년(1879) 동짓달에 건립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한글이 새겨진 철비는 이 비가 국내에서 유일한 것이며, 석비(石碑)에 한글이 새겨진 것은 이윤탁 묘갈(1536, 서울 노원구 하계동)과 이영 묘계비(1686, 경기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경북 문경시에 정조 때 제작된 ‘산불됴심’비 등이 있다.

 

◆ 철비를 세운 까닭은?

철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진나라 학자인 진수(陳壽, 233~397)에 의해 편찬된 ‘정사삼국지’에 유비의 묘 앞에 철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지은 ‘동악집(東岳集)(1640)’에서 회양(지금의 강원도 고성군)의 길가에 높이 3척(약 90cm)의 철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철비로는 1631년에 제작된 충북 진천군 소재 ‘현감이원명선. 정거사비’며, 다음으로 1639년에 제작된 강원도 홍천군 소재의 ‘현감원만춘선정비’가 있다.

그렇다면 왜 철비를 세웠을까. 쇠는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비를 세웠을 것이다.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것을 누른다는 비보풍수의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철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이 세운다’고 기록돼 있다.

또 지금은 공구가 발달해 석비를 다루기가 용이해졌지만 큰 암석을 깨뜨려 자르고 다듬고 글씨를 새기고 연마하는 작업공정보다 금형틀을 만들어 찍어내는 작업이 훨씬 쉬워 철비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조선시대 철비는 크게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와 진도 학계비, 보부상들이 세운 송덕비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특히 철비는 17~18세기 들어 급격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선정을 베푼 수령의 증가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가 늘었다. 또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 후에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려고 철비를 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밖에 철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국가에서 철의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던 제도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경북 성주군에는 19세기에 조성된 2기의 철기가 남아있는데 조성기법이 매우 흡사해 동일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포스코 역사관 자료에 따르면 17~20세기 초까지 남한에 세워진 철비는 300여 기에 달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47기로 조사됐다.(확인된 숫자는 총 54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군수물자로 공출하면서 많은 철비가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며 문화재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파손된 것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들 남아있는 철비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5개 지역 8기에 불과하다.

 

▲ 조선시대 국영 말 목장이었던 화원에 파견된 감독관 선정비군, 화원복지회관내 철비인근에 모아져 있다.
◆ 화원목장 감목관 선정비

철비가 있는 화원면 소재지 일대를 ‘목장’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국영목장이 있었던 까닭이다. 방조제로 가로막혀 뱃길은 끊어졌지만 예전 목포와 해남을 잇는 여객선이 다닐 때만 해도 화원 선창은 ‘목장’으로 행선지가 표기됐다. 화원목장이었던 사실은 철비 주위에 있는 ‘감목관 선정비’가 증언해주고 있다. 화원면은 고려시대 황원군 지역으로 말 목장은 ‘황원장’으로 불렸다. ‘대동지지’에는 ‘황원장은 해남현과의 거리가 90리이고, 진도감목관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진도를 속장(屬場)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화원목장은 광무 10년(1906) 지방관제 개편으로 감목관이 폐지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 있는 선정비에서 화원면의 과거를 어렴풋이나마 읽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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