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를 봤다. 산악인 엄홍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히말라야라는 대자연에 도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이지만 산에 매혹된 ‘산쟁이’들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멈출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영화는 대부분 히말라야 설산(雪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휴먼원정대’가 도착한 네팔 쿰부히말지역의 루클라에서부터 셰르파의 고향으로 불리는 남체바자르를 거쳐 에베레스트에 이르는 여정이 공중촬영으로 비쳐졌을 때 10여 년 전인 2004년 10월에 떠났던 길이기도 해서 감회가 새로웠다. 티베트불교의 축제인 ‘마니림두’ 취재를 겸해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은 아직도 강한 영상으로 남아 있어 어쩌다 화면을 통해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생생한 추억으로 가슴 설레는 것이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

‘엄 대장’으로 통하는 엄홍길은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001년에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8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했다. 그리고 다른 8000m급 위성봉인 얄룽캉과 로체샤르를 등정하여 세계 최초로 16좌 등정에 성공한 대한민국 산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영화 ‘히말라야’는 엄홍길과 박무택의 끈끈한 우애를 다룬 휴먼스토리다. 엄홍길과 박무택은 2000년 캉첸중가(8586m) 원정에서 첫 인연을 맺은 이후 엄홍길이 14좌를 등정할 동안 4좌(캉첸중가, K2, 시샤팡마, 에베레스트)를 함께 등정한 형제 같은 사이였다. 영화에서 박무택은 ‘산에 오르려고 5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순박하고 패기 넘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캉첸중가 원정의 에피소드들을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화면은 ‘2005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휴먼원정대’ 이야기로 넘어간다. 엄홍길은 계명대(영화에는 대명대) 원정대와 함께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로 떠난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원정대의 숭고한 도전은 진솔하고도 가슴 뜨거운 눈물을 자아낸다.

기상악화 등의 문제로 일정이 한없이 지체된 가운데 원정대는 히말라야에 온 지 77일째인 5월 29일 초모랑마의 턱밑 8750m 지점 절벽에서 로프에 매달린 채 꽁꽁 얼어 숨을 거둔 박무택을 발견한다. 박무택의 시신은 당초 베이스캠프까지 이동해 1시간 30분 거리인 티베트 사원으로 옮겨 제를 지낸 뒤 화장해 유골을 수습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거친 날씨 탓에 엄홍길은 ‘세컨드스텝(8700m)’ 바로 위에 돌과 바위로 무덤을 만들었다. 산 사나이 박무택이 히말라야에서 영원히 잠든 것이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엄홍길은 산을 정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산이 잠시 정상을 빌려주는 것일 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정복하려는 욕심보다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비워 나갈 때 그 인생은 비로소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산악문학의 영원한 고전으로,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은 낭가파르바트 단독등반기다. 이 책은 1953년 독일의 산악인 헤르만 불이 성공한 후, 30여 명의 등반가가 희생된 죽음의 산, 낭가파르바트를 단독 등반한 저자의 역사적인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나는 여기 쌓여 있는 눈과 바위와 구름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니까.” 산과 고독은 그렇게 그를 산악인이 아닌 구도자로 만들었다.

삶의 무게를 비워내는 지혜를 

을미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살다보면 인생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을 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 그 산을 오직 앞만 보며 오를 것인가. 아니면 좀 더 편한 우회로를 택할 것인가.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야할 인생길인 것이다. 그 길이 비단길이면 오죽 좋을까. 그러나 ‘검은 고독, 흰 고독’처럼 순간순간 홀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써야하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엄홍길은 이런 말을 했다. “극한 상황에 놓이면 자신도 모르는 가면을 벗게된다”고. 어쩌면 인생은 위선의 가면을 끝끝내 벗어던지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연말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가도록 하자. 삶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면, 내 안의 히말라야도 거뜬할 것이다. 아아, 그것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홀가분한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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