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전리는 북평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영전리는 원래 전옹리(田翁里)라고 불렸다. 그러다 마을에 ‘영숙’이라는 호를 가진 권세가가 있어 호의 영(永) 자를 택하고, 밭이 많은 곳이라고 전(田) 자를 넣어 1913년에 영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저물어가는 을미년(乙未年) 세모(歲暮)에 북평면의 끝자락, 땅끝의 관문격인 영전리(永田里)를 찾았다. 이번 나들이 길에는 박승룡, 김천수 두 분 선생께서 기꺼이 동행해 주셨다. 송지 산정 사시는 박 선생은 전남도 교육위원을 두 차례 역임한 교육계의 원로이고. 김 선생은 광주 풍암고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후 고향인 화산 대지리로 돌아와 촌부의 삶을 살고 있다. 두 분과의 인연은 너무나 소중하고 각별한 것이어서 지면으로나마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소개를 드릴까 한다. 박 선생은 당신께서 발굴한 ‘어란 여인’의 현창사업을 위해 노심초사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해남의 어른이시고. 김 선생 또한 박 선생을 통해 인연을 맺은 분으로 소탈한 인품이 교육계의 진정한 사료(師表)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그렇기에 두 분께서 이번 영전리 기행에 함께 해주신 것은 내게는 실로 과분한 것이었다.”

 

◆ 서홍에서 영전으로 가는 길

남창에서 땅끝해안로를 타고 영전으로 가려면 이진리와 서홍리를 차례로 지나야 한다. 서홍리에 가까웠을 때 김 선생은 이곳이 외가 동네라며 지난 시절 마을 입구의 밭은 온통 김을 말리던 건조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발에 김을 떠서 햇빛에 말리던 풍경은 어느 새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그 김을 전라도에서는 ‘해우(海衣, 해의)’라고 부른다. 정월 대보름이면 ‘해우쌈’을 먹어야 복을 받는다고, 식구수대로 해우쌈을 한입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동국세시기’에도 ‘정월 대보름에 해의로 밥을 싸먹는데 이를 복리(福裏)라 한다’고 했다. 넓적하고 판판한 김에 복을 싸서 먹는, 말하자면 ‘복쌈’인 것이다.

서홍리는 청강 정철호(88) 명창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인 정철호는 열두 살 나이에 국창(國唱) 임방울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익혀 ‘소년 명창’이란 소리를 들었다. 작창과 작곡은 물론 아쟁산조를 창시하는 등 국악계의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서홍리에서 영전리는 지척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수려한 달마산의 풍광을 감상하며 마을의 순한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이윽고 영전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마을을 들어서면 영전공소와 그 건너편으로 영모재(永慕齋)와 영남교회가 있고,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영전의 명물인 ‘영전 백화점’과 남전리 ‘땅끝만물슈퍼’가 잇달아 모습을 드러낸다.

◆ ‘전옹’이라 불리던 마을

영전, 서호, 남전, 남성 등 4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진 영전리는 북평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마을 중에 서호와 남전은 정조 13년(1789)에 만든 호구총수(戶口總數)라는 사료에도 기록으로 나타난다. 특히 남전은 중국과 제주를 연결하는 포구가 있어 양하포(良下浦)라 불렸다. 마을의 공동 의례인 도제(都祭, 헌식제)가 영전리에서도 매년 정월 대보름 경에 치러진다. 영전마을과 이웃한 남전마을은 도제를 비롯한 모든 행사를 함께 한다. 한때는 300여 가구가 거주했다는 영전리에는 현재 170가구 남짓한 주민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배추, 마늘 등의 밭농사와 김, 굴, 전복 양식을 하고 있다. 2008년에는 전남농촌체험관광마을인 ‘땅끝해뜰마을’로 지정됐다.

영전리는 원래 전옹리(田翁里)라고 불렸다. 일설에는 마을에 전옹이라는 덕망 높은 사람이 살았기에 그 사람의 이름을 따 마을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마을에 ‘영숙’이라는 호를 가진 권세가가 있어 호의 영(永) 자를 택하고, 밭이 많은 곳이라고 전(田) 자를 넣어 단기 4246년(1913)에 영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영숙’은 마을 입구의 ‘영모재(永慕齋)’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옹이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밭 전(田)자에 아비 옹(翁)자를 쓰고 있다. 이를테면 밭을 의인화해 인격적으로 높인 모양새인데 이곳에 밭이 많고 주민들도 어업보다는 밭농사에 종사하는 비중이 높다보니 마을이름을 그렇게 짓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일제강점기 송지 심상소학교(현재의 송지초교)를 다녔던 박 선생은 영전 아이들이 달마산을 넘어 송지 소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짚신을 신고 달마산을 넘었다는 것이다. 당시 영전 아이들이 ‘전옹리’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영전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고 나서도 한동안 전옹리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다. 짚신 신고 달마산을 넘었다는 이야기는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하지만 지금도 영전리를 해돋이와 해넘이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라 해서 마을에서 달마산 도솔봉에 올라 해넘이를 본다는데 예전 학교를 다니러 넘어 다녔을 정도면 이러한 수고는 무난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 남성항 앞 바다에 떠 있는 닭섬
◆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남성항

‘활구미’라 불리는 남성리는 이름 그대로 활처럼 휜 아름다운 포구다. 이웃인 통호리의 사구미와 같이 포구에 ‘구미’라는 이름이 붙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미’는 ‘만의 후미’를 뜻한다. 사구미는 모래가 많은 곳이라 모래 사(沙)자를 넣어 그대로 이름이 됐다. ‘양지바른’ 곳을 ‘다순구미’라고 하는데 목포의 온금동이 이에 해당한다. 이곳 선창은 2012년 8월부터 여객선터미널을 겸하고 있다. 완도군 군외면 원동에 있던 터미널을 옮긴 것이다. 원동 선창은 수심이 낮아 배를 접안하기 어렵고, 배를 접안해도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불과 한 시간 정도 밖에 안 돼 섬 주민들이 당일치기로 일을 보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반면에 남성항에서 배를 이용하면 아침에 시장을 보거나 일을 볼 수 있었다. 백일도와 흑일도, 동화도 등 섬 주민 50여 가구가 이용하는 작은 선창이지만 주말이면 자가용은 물론이고 대형버스들로 빼곡하다. 주말에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는 것은 바다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완도와 해남 사이의 작은 섬과 갯바위가 주요 포인트다. 남성항은 이렇듯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명령항로’로 지정해 배를 운용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예전 뱃길은 불편했다. 아침 9시에 완도항을 출발한 여객선이 원동과 남창을 거쳐 백일도~노화도~소안도~삼양진~어란진~진도 벽파진~목포로 이어지는 멀고 지루한 뱃길이었다. 목포에는 오후 4시가 다돼서야 도착했다. 지금의 ‘섬사랑 1호’는 그때와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혹시라도 급한 일이 생기면 자신의 배로 해남과 완도를 오갈 수가 있으니 큰 불편은 없어진 셈이다.

남성리 앞바다에 ‘닭섬’ 또는 ‘계도’라 불리는 섬이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두륜산 간룡(幹龍)이 달마산을 통해 도솔봉과 영전의 진산인 윤도산(284m)을 거쳐 이곳 닭섬으로 해서 제주도 한라산을 향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닭섬은 용의 여의주요, 남성리는 용이 바다로 입수하기 전 마지막 긴 호흡을 하는 형국이다.

◆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 영전리 도제

영전리의 도제는 인근 묵동리의 헌식제와 더불어 오랜 전통을 지닌 동제다. 도제는 정월 대보름 하루 전날부터 허재비를 만들어 모시고 풍물을 치며 시작한다. 당산과 당집이 없으며 예부터 큰 마을 가운데의 장소를 택하여 논에서 모셨다. 지금은 마을이 나뉘어져 영전마을 회관에서 도제를 모신다. 예전에는 제를 주관하는 제관과 굿물을 담당하는 득주가 있었다. 지금은 제관역할을 이장이 하고 있으며, 마을노인회장과 총무 등으로 구성된 마을 노인회에서 도제의 진행을 담당한다. 설을 지낸 2~3일 후 회의를 소집하여 지신밟기와 도제의 규모를 정하고 있다. 젊은 사람이 없어 점점 절차가 간소화되고 그 형식을 유지해가는 정도라고 한다. 최근에는 도제 터를 복원하고 남전마을까지 이어지는 도제 길을 복원했다. 정월 대보름날에 치러지는 도제는 하루 종일 진행된다. 마을이 워낙 크다보니 용왕제를 지낸 후에는 마을 중앙의 사장나무에서 잠시 쉬었다가 지신밟기를 한다.

도제의 준비는 굿물을 담당하는 득주가 한다. 득주에게는 전답이 주어지고 득주는 제주를 준비했다. 그리고 제물 마련은 그해 바다에서 나는 퇴비를 건져 팔 수 있게 된 사람이 장만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퇴비를 건져 팔 수 없게 된 다음부터는 마을공동회비로 충당하고 있다. 지금은 헌식상은 그 해 이장 집에서 준비하고 선창에서 용왕에게 올리는 제물은 영전리어촌계장과 남전리어촌계장이 준비한다.

영전리는 보름전날 남자들이 모여 허재비를 만든다. 허재비라 부르는 이것은 서너 살 아이만한 크기이다. 허재비에는 하얀 천으로 지은 저고리를 입히고 눈, 코, 입을 그리거나 붙였다. 특히 남성을 상징하는 성기를 크게 부각시켜 이 주변에는 화려하게 장식한다. 도제 전 날 주민들은 마을회관과 주변을 청결히 한다 마을 청소가 끝나면 도제가 있는 새벽에 마을 회관입구에 금줄을 치고 대나무가지를 세워둔다. 예전에는 여러 마을의 한 가운데인 논에서 제를 지냈으므로 마을 입구에 쳤다.

도제날은 상쇠, 중쇠, 장구, 북, 소고, 징잡이와 창부, 포수로 이루어진 걸립패가 오전에 마을회관 앞에서 풍물을 치며 논다. 그리고 점심 무렵 회관에서 제사를 모시고 지사굿(제사굿)을 친다. 여자는 굿에 참여할 수 없다. 이어서 마을회관 밖의 논으로 풍물을 치며 나가 당산굿을 친다. 그 후 마을의 샘을 돌며 샘굿을 친다. 마을회관에서 휴식을 취한 후 선창으로 향하며 선창굿을 한다. 선창에 도착하여 부두에서 풍어제를 지내고 용왕님께 헌식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은 뒤에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를 한다. 저녁에는 마을회관 앞에서는 달집을 태우고 제를 올린다. 그러나 도제를 지내는 마을민은 60대 후반에서 70대로 마을에 도제를 이어갈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이 영전리의 현실이다.

▲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영전백화점
◆ 다시 해 뜰 날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바다를 ‘갱번’이라고 불렀다. 그 바다는 한 시절 영전을 살찌웠다. 김 농사가 돈이 됐던 70년대 영전에는 무려 16개의 가게가 있었다. 마을 개들도 5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돈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이곳에 가면 영전의 명물인 ‘영전 백화점’이 있다. 여러 차례 신문과 잡지, 방송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곳이다. 백화점이란 별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어진간한 것은 다 갖췄다. 근동은 물론이려니와 인근 섬 주민들도 즐겨 찾는다.

1963년 문을 연 영전 공소는 평일에는 찾는 사람 없이 주일에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이 번성했을 때는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던 공소는 고령화가 되면서 지금은 주일전례에 땅끝을 찾는 여행객들이 들르는 곳이 됐다. 공소와 길 하나 사이인 영남 교회는 지역아동센터로서의 역할을 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탄이 가까워졌어도 아무런 장식도 없이 쓸쓸한 것은 영전의 오늘을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 도로벽에 씌어있는 영전의 새로운 이름(땅끝해뜰마을)처럼 또다시 해는 떠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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