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굴동은 기암괴석들로 신비감을 더하고. 가장 큰 용굴 주변은 움푹 꺼져 있어 혹시 분화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산림청은 지난 8월 화산 관두산(館頭山,178m) 용굴동 풍혈을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했다. ‘산림문화자산’이란 산림과 함께 살아온 선조의 생활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생태적·경관적·정서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유·무형의 자산을 말한다. 국가 산림문화자산은 산림청이 지정·관리한다. 이번에 지정된 산림문화자산은 관두산 풍혈 및 던(덤)바위샘을 비롯해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완도수목원 가시나무 숯 가마터, 울진 소광리 황장봉산 동계표석 등 4건이며 지금까지 모두 13건이 지정됐다.

 

추울수록 더운 김이 솟아오르는 곳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3년 12월 중순경에 처음 관두산을 올랐다. 산행의 목적은 용굴동(龍窟洞)의 신비를 탐사하기 위함이었다. 한겨울에 굴에서 더운 김이 솟아오른다는 용굴동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이색지대였다. 여름철에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곳으로는 전북 진안 대두산의 풍혈냉천(風穴冷泉), 울릉도 도동풍혈, 그리고 얼음이 어는 밀양 얼음골과 경북 의성 빙계계곡 빙혈(氷穴)이 유명하다. 그러나 겨울철에 따뜻한 자연바람이 나오는 곳은 당시만 해도 이곳 관두산 용굴동이 유일했다. 그러던 것이 2005년 충북 보은 구병산 풍혈에 이어 2008년 말 김해 생림면 작약산 풍혈이 발견되면서 3곳으로 늘어났다.

보은에는 삼산(三山)이 있다. 지아비산인 속리산 천왕봉과 지어미산인 구병산, 그리고 아들산인 금적산이 그것이다. 2005년 1월 등산로 정비를 위해 구병산에 올랐던 보은군청 공무원들이 발견한 4곳의 풍혈을 비롯해 2008년 2월에도 인근에서 새로운 풍혈이 발견됐다. 혹자는 구병산 풍혈을 진안과 울릉도 풍혈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풍혈로 꼽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구병산에 훨씬 앞서 세상에 알려진 관두산 풍혈을 외면하고 이들을 일컬어 3대 풍혈 운운하는지. 무슨 기준에 근거해 이런 평가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됐건 이런 주장에 결코 동의할 생각은 없다. 굳이 꼽자면 겨울 풍혈로 관두산과 구병산, 작약산 풍혈을, 여름 풍혈로는 대두산과 울릉도, 의성 빙혈을 각각 3대 풍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이들 풍혈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진안 대두산 풍혈냉천은 제법 오래된 곳이다. 풍혈과 냉천이 발견된 것은 1780년경으로 당시에는 온천이 솟아나고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과 삼복더위에 찬물이 치솟는 냉천 2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곳의 냉천과 그 주위의 풍혈만이 남아있다. 이 냉천의 물은 한국의 명수(名水)로 꼽힐 정도로 물맛이 좋다. 풍혈냉천이 알려지게 된 것도 허준이 약을 짓던 물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부터라고 한다.

울릉도 도동항 인근 봉래폭포 가는 길에 풍혈이 있다. 이곳은 북면의 천부풍혈과 더불어 천연에어컨으로 불리는 곳이다. 천부풍혈은 천부항 주변 도로변에 있다. 이곳은 개척 초기에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낸 후 막을 치고 사방을 살펴보니 빽빽이 둘러싼 나무로 아무 곳도 볼 수 없고, 다만 나무를 베어 낸 곳으로만 동그랗게 하늘만 보여 ‘천부(天府)’라 불렀다는 곳이다. 풍혈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의 찬 공기가 바위틈으로 용출돼 항상 섭씨 4도 가량을 유지하므로 봉래폭포 풍혈과 마찬가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작약산 풍혈은 약 40여 년 전부터 인근 성포마을주민들은 이곳을 ‘호랑이 굴’이라 불러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08년 12월 재발견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도 방음산 풍혈과 비슷한 작약산 풍혈은 관두산과도 지질 구조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용굴을 중심으로 11곳의 크고 작은 풍혈이 있으며 겨울철에도 17∼20도 가량의 온도를 유지해 주위로 고사리 및 이끼류가 자라고 있다.
베일에 싸여있는 용굴동의 신비

 

관두산 용굴동을 처음 지면에 소개한 이후로 TV를 비롯한 언론매체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았고. 지질학자들은 기사에서 열어 뒀던 바다온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혹시. 산불?

추운 겨울 날 우연히 화산 관두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불의 실체는? 그것은 다름 아닌 용굴동 풍혈들이 뿜어내는 더운 기운으로 인한 김 서림 현상이 마치 불이 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은주가 뚝 떨어질수록 선명하다.’

오랜만에 관두산을 다시 찾았다. 이미 충분히 매스컴을 탄 탓인지 등산로도 예전보다 잘 정비돼 있고, 길안내표지판도 곳곳에 세워져 있다. 관동 입구 삼거리에서 무학리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봉우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행은 이곳에서 시작하거나 봉우사를 지나 임도에서 올라도 된다. 이 임도는 지난 봄 만해도 열려 있어 차로 돌아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길을 막아놓았다.

관두산 등산길은 봉우사 초입의 당고개(땅곡)에서 출발하는 것이 무난하다. 등산로는 별 무리는 없다. 10분가량 오르면 조선시대 말을 방목했다는 목장터(말돌이)가 있고 삼마도와 죽도가 떠있는 만호바다의 시원한 풍광을 감상하며 능선 길을 오르면 이내 관두산 봉수대에 다다른다. 왜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는 멀리 제주 모슬포에서 시작돼 바다를 건너 갈두산 봉수를 거쳐 관두산에서 진도 첨찰산 봉수로 이어졌다.(신증동국여지승람)

봉수대 못미처엔 지난 날 구들장으로 쓰기 위해 돌을 떼어낸 흔적이 보인다. 이곳에 던바위샘이 있다.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대로가 약수다. 이 약수는 기도에 영험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예전 봉수대는 높이가 5m가량 됐으나 70년대 들어 무지한(?) 군사정권이 헬기장을 조성하면서 봉수대의 석재를 헐어 쓰는 바람에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게 됐다. 봉수대 옆 헬기장을 지나 다시 100여m 가량 산길을 잡으면 네 갈래 길이 나온다. 곧바로 가면 낭강절벽 가는 길. 낙화암을 무색케 하듯 깎아지른 절벽에 올라서면 바다가 눈앞에 잡힐 듯 가슴을 죄게 한다. 동백과 소사나무가 군락을 이룬 혓바닥 바위가 인상적인 낭강절벽은 봄이면 진달래꽃이 붉게 타올라 시린 바다와 어울려 황홀경을 연출한다. 낭강절벽. 확인할 길은 없으나 혹시 낭강은 낭자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는 ‘낭강(娘降)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인근 백포만 백방산에 낙화암이 있듯이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와의 국제무역항이던 관두량이 있던 이곳에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명소가 없을 리 없고. 낭강절벽이 지명으로나마 그런 설화를 증언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길안내 표지판에는 ’난간절벽‘으로 적혀 있다.

낭강절벽을 지나 해안을 끼고 10분쯤 가면 호젓한 산길은 계속되고 마지막 고개를 남겨 둔 오른편으로 둥그런 풀섶이 눈에 띈다. 노루목이다. 노루목을 올라 용굴동에 들어서기 전 길 옆 돌무덤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은 처녀무덤이라고도 부르나 이 인근지역에서 예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었다는 주민들의 말에 비춰볼 때 혹시 호식총(虎食塚)은 아닐는지. 호환(虎患)을 두려워한 옛사람들은 돌무덤으로 호식총을 만들고 벌초는커녕 사람의 접근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당고개에서 출발해 용굴동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용굴동은 기암괴석들로 신비감을 더하고. 가장 큰 용굴 주변은 움푹 꺼져 있어 혹시 분화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1872년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 해남편을 보면 ‘관두산 아래로는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머물고. 정상에 봉수가 있으며 그 아래로 굴이 있는데 찬바람이 일어 낙엽이 날리며 그 깊이와 끝을 알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관두산 풍혈은 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오는 구조로 지하로 유입된 물이 지하의 열원에 의해 데워져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관두산을 이루는 암석의 틈새를 통해 더운 바람이 올라오는 현상으로 추정된다. 용굴을 중심으로 11곳의 크고 작은 풍혈이 있으며 겨울철에도 17∼20도 가량의 온도를 유지해 주위로 고사리 및 이끼류가 자라고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중생대 백악기층(만길리층) 지질로 지체구조(地體構造)는 영동~광주 함몰대에 속하며 반상복운모 화강암으로 구성됐다. 관두산은 대부분 침활 혼효림이며 주위의 지역은 생태·자연도가 1등급(지형)으로 분류된다.

용굴동엔 엄나무가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엄나무가 위장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젠 구경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해졌다. 몸에 좋다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의 속물근성이 이곳까지 미치다니. 용굴동의 자연경관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산림문화자산으로의 지정은 그나마 다행스런 결정이었다는 생각이다. 용굴동을 찬찬이 둘러보고 있으려니. 풍혈의 온기 때문일까. 제철 잃은 진달래가 눈에 띄고 산국화도 잡목사이로 모습을 내민다.

용굴 안에 있는 좁은 구멍으로 돌을 던지면 풍덩하는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와 인접한 관동포구 큰댓골 해안에서 새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들려주는 따뜻한 바닷물, 그리고 겨울철에도 유난히 게가 많이 잡힌다는 게바위 등은 아마도 바다로 온천수가 흘러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용굴동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영화는 간데없고 지명으로만 남은 관두량

용굴동을 내려와 잘 닦인 길을 따라 백제 천 년 고찰이 있었다는 관두사 터를 찾는다. 일단 산길의 불편함에서는 벗어났지만 20년 전쯤에 신작로가 나면서 굴참나무 군락이 크게 훼손됐고. 동백나무도 엄청난 양이 이 길을 통해 반출됐다고 한다. 길이 나면서 운치가 있던 오솔길은 사라지고 자연도 상당부분이 훼손됐다. 그래도 해안선을 따라 도는 임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6.25를 겪으며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관두사는 바닷가에 위치한 절이었다. ‘관두사의 종소리 새벽을 가르고…’ 지금도 마을 촌로들은 희미하게나마 노랫말을 떠올리며 소싯적 관두사를 추억한다. 바다에 접힌 절집으로는 관음도량인 강화 보문사,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김제 망해사 등이 있다. 관두사 역시 뱃길의 안녕을 빌던 내력 있는 관음 기도처였는지도 모른다. 잡초 우거진 무상한 절터를 내려오니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약수로 갈증을 푼다.

산을 내려와 관동방조제를 건너 관두산을 바라다본다. 멀리서 보는 관두산은 별날 것도 없는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밋밋한 모습이다. 하지만 관두량의 진산이었을 저 산은 과거 대륙을 오가던 배들의 이정표였을 것이다. 산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데 바다는 달라졌다. 해방 후 미군정시절에 관동리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그 옛날 바다는 육지로 변했다. 방조제 인근에는 관(館)터와 영(營)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민가와 공장이 들어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해남에는 이곳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대 해양도시가 곳곳에 있다. 그 시절의 영화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 후천개벽의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 혹시 올지도 모를. 덧없이 흔들리는 갈대에게로 부질없는 마음을 실어 보낸다. 관동, 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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