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또는 성은 출생계통을 나타내는 계례붙이의 칭호로써 성씨는 단계별 혈연의 명칭으로 자기 혈족을 구분하는 기분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는 성씨를 가지고 있고 그 시조가 왕후장상(王侯將相)으로 훌륭한 분들이 많다.

우리지역 해남도 많은 성씨들이 오랜 세월 살아오고 있고 또한 해남을 그 성씨의 본관(本貫)으로 사용한 윤, 차, 정, 송, 김 씨 등도 있다. 조선조 시대는 계급사회여서 노비나 천민 등 일부 사람들은 성을 갖지 못하고 살다가 조선조 중엽 이후에 가승이나 족보문화가 발달되고 시대가 개화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갖게 되었다.

각 성씨들이 처음 시조로부터 본관을 가지고 살 때에는 그 자손 수가 적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후손의 수가 번창하고 또한 그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생활터전을 이동, 번창하면서 그 후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그 지역 이름을 따라 중시조(파조)로 삼고 분관하여 살아오면서 현재와 같이 많은 본관이 형성 되었다. 1997년 중앙일보에서 발간한 한국 성씨 백과, 성씨의 고향에 기록된 우리나라 본관별 성씨는 3,435 종류로 그 수가 많다.

그 중 한 성씨인 초계 정씨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해남과 인연을 맺고 큰 맥을 형성하였으니 그 내력을 살펴볼까 한다.

그들의 시조는 배걸(倍傑)이며 홍문관 강학 추성화 공신으로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玉田) 땅에 살면서 본관을 초계라고 하였다.

그 후손 일부가 13대째 내려오고 해남과 인연을 맺고 살면서 부(富)와 권력(權力)을 이용 정재전(鄭在田)이 해남의 호장(戶長)이 되면서 이 지역을 위해 공헌하고 자손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해남을 다스리는 호족으로 형성 되었다.

그의 손자 정귀함(鄭貴咸)은 무남독녀 딸이 나주 금남 최부와 혼인하고 해리 부촌동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관서재를 설립, 해남을 문향으로 가꾸는데 공헌 하였으며 그의 동생 정귀영(鄭貴瑛)은 1남1녀를 두었는데 딸이 해남 어초은 윤효정(尹孝貞)과 혼인 5형제를 낳고 해리에서 살다가 백연동으로 새터를 잡아 살면서 500년 넘은 해남윤씨 종가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최부와 윤효정은 사촌 동서간이다.

정문길(鄭文吉)도 1남1녀를 두었는데 여흥 민중건(閔仲騫)과 혼인하여 그 후손이 번창하고 현재도 경향 각지에서 활발하게 생활하고 있으며 정기립(鄭起立)의 여식 또한 나주 임수와 결혼, 5남 1녀를 두고 조선조 중엽 정승판서와 문장가 등 많은 후손이 배출, 성장하여 큰 가문으로 번창하였다.

나두동이 쓴 보략이란 기록에 의하면 초계정씨 정원기는 당시 해남 바닷가에 자주 나타나는 왜구들의 침략으로 고통당하는 해남현민들을 위해 읍리가 되기를 지원하고 그 손자 정재전이 향리가 되어 당시 해남의 치소가 현산면 고현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관사와 객사를 자비로 신축하였고 또 함길도 입거노비 10구를 감재받아 해남 현에 입역시켜 향역을 면재받아 호장으로써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후손들이 문무과에 입격하여 중앙관서에 진출하였다.

또, 이 가문과 혼맥을 형성하였던 모든 가문이 처가의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승승장구하였다.

전국 정씨들의 본관은 40개로써 그 수가 많고 후손 또한 전국에 분포되어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해남에서 약 100년간 부와 권력을 누렸던 정 호장 가문의 후손은 찾을 길 없고 해남읍 관동마을 동쪽 야산에 남아있는 5~6기의 초라한 무덤인 그들의 선산만이 그 흔적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해남이 본관인 해남정씨 역시 시조가 정공유(鄭公裕)이며 전국에 후손이 400여명만 살고 있다는 기록을 봐서 답답할 뿐이다.

흥망성쇠, 부귀영화란 어느 개인이나 가문 또한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나 과거 이 고장에서 큰 맥을 형성하며 오래 살았던 초계 정씨와 또 해남 땅을 본관으로 갖는 해남 정씨는 그 기록과 흔적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 고장 출신 후학들은 물론이고 특히 향토사가들의 많은 연구가 있어 꼭 밝혀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춘헌 임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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