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유재란당시 순절한 의병들의 무덤으로 전해 내려오던 옥천만의총은 발굴조사 결과 5~6세기 고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옥천 성산리(星山里)에 있는 만의총(萬義塚)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문득 남원 ‘만인의 총’을 떠올렸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을 합동으로 매장한 ‘만인의 총’은 이름 그대로 만 명의 무덤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의총’도 ‘임진왜란 즈음에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내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만의총’ 역시 정유재란 때 성산벌 전투에서 희생된 원혼들이 묻힌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2009년 3월 1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해남 윤씨 족보 야사에 전하는 기록

‘성산리 대교(大橋, 한다리)들에 있는 만의총은 본래는 6기가 있었으나 1960년대 경지정리사업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3기만이 남아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은 이 무덤을 몰뫼, 몰무덤, 말무덤 등으로 불러와 고분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만의총으로 불리고 있으며 역사적인 전거(典據)는 미약하나 다만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우리 지역에서 창의(倡義)한 의병들과 왜군들이 교전하여 쌓인 시체가 산을 이뤘고, 마을에 남아있던 남녀노소의 주민들이 시신을 거둬 합장하고 만의총이라 이름하였다는 구전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옥천주민들은 그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만의총을 설명하는 표지판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다. ‘역사적인 전거는 미약하나’라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성산벌 전투가 공식적인 문서가 아닌 해남 윤씨 족보에 야사(野史)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야사를 보면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의 패배로 제해권을 상실한 왜군은 해남을 공격하기 위해 3만 대군을 몰아 강진군 도암면과의 경계인 병치(兵峙)를 넘어온다.

이에 윤륜 윤신 형제와 조카인 윤치경이 병치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대교들에서 전사한다. 그러자 윤신의 부인 해주 오씨와 윤치경의 부인 여산 송씨가 피난처를 찾아 1606년 강진군 군동면 화방리로 이주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해남 윤씨 종중에서 1926년도에 발행(2008년 8월 한글판으로 번역 출간)한 ‘화암사지’는 옥천면 성산벌 전투에서 해남 윤씨 일곱 사람이 함께 순절한 사연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순절한 일곱 명은 윤륜, 윤신(윤륜의 제), 윤동철(윤신의 자), 윤치경(윤륜의 장조카), 그리고 윤이경, 윤익경(윤이경의 제), 윤동호(윤익경의 자) 등이다.  

이와 관련해 해남 윤씨 칠충(七忠) 선양회는 화방리에 화암사를 짓고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다. 한편 호남지방 의병들의 행적을 적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는 대교들 싸움의 의병장으로 윤현, 윤검, 윤신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윤현 윤검 형제는 달마산에서 기병하여 대교들 전투를 거쳐 장흥석대 전투에서 윤현이 순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옥천고분군(만의총) 1호분에서 출토된 서수형 토기, ‘상서로운 동물’이라는 서수형토기가 신라권역이 아닌 곳에서 발견되기는 해남이 처음이었다.
고대사의 미스터리 ‘서수형 토기’

그러나 사람들은 궁금했다. 과연 만의총은 만 명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무덤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사실을 밝혀줄 유물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해서 2006년 10월에 동신대 박물관이 만의총 1호분에 대한 시굴조사에 들어갔고.

2009년 2월 발굴조사에서 토우(土偶)가 장식된 용 또는 뿔 달린 말머리 형태의 서수형(瑞獸形) 토기(술병) 1점과 신라양식이 가미된 가야계 유개대부발(有蓋臺釜鉢, 안주를 담는 토기) 1점, 백제계 금장식 은제곡옥, 곡옥, 유리옥, 관옥, 유리구슬 천에 싸인 청동거울, 청동팔찌, 일본 오키나와산 조개팔찌, 철검, 철촉 등 무려 1100여점의 유물이 대거 출토된다.

이로써 만의총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의 무덤이 아닌 삼국시대인 5~6세기경 석실묘로 밝혀진다. ‘상서로운 동물’이라는 서수형토기가 신라권역이 아닌 곳에서 발견되기는 해남이 처음이었다.

서수형토기와 토우는 신라 경주에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동안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백제가 다스리던 해남 지역에서, 게다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토우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출토된 것이다.

경주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릉 앞에 있는 무덤 가운데 C지구 3호분에서 출토된 서수형토기(6세기로 추정)는 거북 모양의 몸통에 용의 머리와 꼬리를 하고 있는 상형(象形)토기로 1978년 보물 제636호로 지정됐다.

만의총에서 출토된 서수형토기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그것에 비해 외관상 다소 투박하지만 시대가 앞서고, 남근(男根)이 노출된 토우가 결합된 토기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남근을 노출한 토우는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출토되나 경주 지역 외에서 기마형 혹은 서수형 인물토기가 출토된 적은 만의총이 처음이며 더구나 남근을 노출한 이런 토기는 경주에서도 출토된 적이 없다.

만의총의 서수형토기는 용인대 우학문화재단이 2004년 공개한 말머리 모양의 서수형토기와 매우 흡사한 것이어서 이 토기의 출처도 해남지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백제와 신라, 가야, 왜 등 4개국의 유물이 한 곳에서 출토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뿐이 아니다. 무덤 양식도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도, 신라의 적석분도 아닌 독특한 것이었다.

목관과 석곽(石槨) 사이의 측벽에 판석을 채웠다거나 석곽의 뚜껑돌과 목관 사이의 공간까지 점토로 밀봉한 점. 그리고 석곽 바닥에 판석을 깐 것 등은 백제나 가야, 신라, 일본 등의 기본적인 묘제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라서 가히 ‘해남식’이라 부를 만 하다.

정유재란 당시 의병들의 무덤으로 믿었던 ‘만의총유적보존회’를 비롯한 지역주민들에게 이와 같은 발굴 결과는 몹시 당혹스런 것이었다. 매년 제사까지 지내며 기려왔던 이 무덤이 삼국시대의 유적이라니.

그런데 고분의 상층부에서 하단부와는 다른 인(燐)성분을 가진 토양층이 발견돼 이를 의병들이 묻힌 것 때문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기존 고분 위에 다시 무덤을 쓴 형태라는 것이다.

3기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3호분은 2008년 3월부터 5월까지 두 달 동안 국립 광주박물관이 발굴했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대부분이 없어져 중요 내용은 확인할 수 없고. 석실 내부와 도랑 등지에서 구슬류와 철기류, 개배(蓋杯)·단경호(短頸壺) 등 토기류가 출토됐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은 토착 세력

백제의 강역이 분명한 이곳에서 신라와 가야, 왜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해남지역이 과거 국제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방증하는 근거로 볼 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대단한 권력자로 마한의 부족국가 왕과 같은 지위를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백제의 강역이 대륙의 산동반도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운남성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대륙 백제와 한반도 백제라는 방대한 영토를 경영했다면 한반도 서남권인 과거 마한의 토착세력이 여전히 세를 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 옥천 세력은 해상무역권을 쥐고 신라와 가야는 물론 왜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해남지역에는 옥천 세력뿐만 아니라 북일권 세력과 현산 백포만권 등 세 개의 강력한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세력들은 각기 독특한 묘제의 고분을 남겨 놓았다.

고대사가 흥미로운 건 얼마든지 개연성 있는 가설을 제시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정확한 사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현실에서 고고학적인 접근은 어차피 실체에 가까운 추론에 불과할 뿐이다.

아직까지도 한사군의 위치하나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고대사가 더욱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의 춘추필법에 의한 사서를 그대로 차용하거나 식민사관이라는 옹졸한 시각에 사로잡혔던 영향이 크다.

민족사관을 가진 사학자들이 ‘대륙 경영설’을 주장하면 무슨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처럼 부정하거나 비주류의 가설쯤으로 치부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를 왜곡한 춘추필법으로도 모자라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고구려사마저 집어 삼키려는 중국에 맞서려면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추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만의총에 대한 성격을 단지 이 지역을 거점으로 활약했던 토착세력이 아닌 ‘신라의 왕족이나 가야의 왕자가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강대국이었던 백제로 망명길에 올라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가정을 할 수도 있다.

전북 고창 선운산에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들어와 수도를 했다는 석굴이 있다. 이름도 ‘진흥굴’이다. 신라의 왕이 백제 땅인 이곳까지 와서 출가한 까닭은 무엇인가.

설화라고는 하지만 백제 무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신라 선화공주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만의총을 해석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다.

스토리텔링을 위해서라면 청해진의 장보고 무덤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 정황상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의총은 5~6세기 유적으로 추정돼 8~9세기에 활약한 장보고와는 3세기 가량의 시차가 존재한다.

 

국가중요문화재로 보호해야 할 유적

만의총이 정유재란 때의 의병들의 무덤으로 알려졌을 때 이곳은 향토유적에 지나지 않았다. 똑같은 성격의 남원 만인의 총이 1981년에 국가사적(제272호)으로 지정된 것에 비하면 대단한 홀대가 아닐 수 없다.

지난 4월에야 ‘해남 옥천 고분군’으로 하여 전남도기념물(제248호)로 지정이 됐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미흡하다. 당연히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서수형 토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의총의 서수형 토기가 미추왕릉 지구의 것에 비해 시대가 앞서고, 독특한 양식에 출토지가 명확한 점, 그리고 4개국의 유물이 동시에 나왔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 보호해야 합당한 예우가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고대의 무덤인데다 정유재란 의병들을 합장한 사실이 확인된다면 만의총의 가치는 보다 확실해질 것이 틀림없다.

해남군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옥천을 서수형 토기의 고장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만의총 주변으로 대형 서수형 토기 조형물과 입간판을 세워 그 가치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 등이다.

지역에서부터 이러한 희귀 유물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자긍심을 가질 때 외지사람들도 해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이아닌가.

 

해남 박물관을 건립해야 하는 이유

연이어 계속 내리던 늦은 가을비가 그치고 모처럼 날이 갠 금요일 낮. 만의총을 찾았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만의총을 보면서 ‘이 유적이 경주에 있었다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서수형 토기에 대한 홍보만이라도 제대로 하고. 이의 조형물과 복제품이라도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왜 하지 않는 것인가. 그동안 해남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국립 광주박물관에 가 있다.

만의총에서 출토된 서수형 토기를 비롯한 유물은 현재 국립나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적어도 역사문화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면 ‘해남 박물관’의 건립을 서둘러야 맞다.

박물관을 건립하고 다른 지역으로 나가 있는 유물들을 되찾아서 체계적으로 전시할 때 해남의 역사는 오롯이 살아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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