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년)부터 현재까지 약 1,080년간 불려오고 있는 고유명사다.

옛날에는 “색금”이라 불렸으나 신라시대에 와서 “침명”이라 하였고 한때는 고현치소 근방을 당악이라고 한 때가 있었으나 고려 초에 해남이라 개칭되었다.

당시에는 중앙관서의 행정력이 말단 지방까지는 미치지 못해 국가에서 요구하는 부역이나 세금만 내면 되는 시대이다.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오랜 세월동안 해남의 치소와 현청은 현산면 고현에 있던 것을 바닷가이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관계로 조선조 태종9년(1409년)에는 삼산면 계동뒷산 쪽에 잠시 옮겼던 시대도 있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현 위치로 옮겨 신축했다.

한 때는 해남과 진도를 합쳐 해진군으로 칭하면서 치소는 해남 땅 삼산 녹산 아래 있었으며 세종19년(1437년) 진도군을 분군시키면서 해남현이 되었고 그 당시 삼산면 일부 바다와 연접된 땅은 진도군 삼촌면으로 남아 있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이 지방에 터를 잡고 살았던 호족인 초계정씨들이 재력과 권력을 이용 그의 손자인 정재전씨가 호장을 지원하면서 해남현청도 현 위치로 옮겨 자신들의 재산을 들여 신축하였고 국가에서 요구하는 군민들의 부역도 면제시키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 초계정씨 가문에서 해남을 다스리는 기간은 3대에 걸쳐 약 100년간이었고 그후 조선조 세종 때 현감이 첫 취임하면서 행정체제가 바로 서고 현감 1명, 좌수 1명, 별감 2명, 수사 1명, 원후우 1명 목관 1명 등의 관리들이 현내면, 비곡면, 청계면, 마포면, 산포일도면, 산포이도면, 황원면, 장내면, 녹산면, 화산면, 현산면, 은소면 등 12개 면으로 구분하여 행정을 하였다.

해남읍성도 현청이 현 위치로 옮긴 후인 1437년경 세종 때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읍성의 규모는 성 둘레가 2,857자 높이가 15자이고 안쪽은 12자이며 동문 서문 남문의 삼대문과 북쪽에 망루가 설치되었고 저수지는 없었다.

현재 읍성 일부가 남아 있는 군청 뒤쪽에서 향교 가는 길 안쪽으로 상설시장 뒷길 따라 해남장여관을 거쳐 해남농협 본소 뒤쪽에서 서초등학교 담장으로 해서 해림정식당 쪽으로 연결된 타원형의 형태였다.

현재까지 여기저기 성 밑 기단석이 남아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으나 동문과 서문의 위치는 정확치 않고 남문의 위치는 해남장여관이며 북쪽 망루는 서초등학교 뒤쪽 지금도 공터로 남아 있다. 대문의 크기는 필자가 공사현장에서 발견하여 2기(基) 문주석을 보관하고 있어 대문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축성의 목적은 성 안에 살고 있는 관리나 주민 또 현청을 보호할 목적에서 축성되었다.

조선시대 해남현은 전라도 영암군 해남현이었는데 그 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영암군 인근 6개면과 황원현 등을 합병시키면서 고종 32년(1895)에 해남군으로 승격되고 그 해 10월에 초대 군수 이용중(무과)이 취임하고 23개면으로 분면되어 행정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13개면으로 다시 개편되었다가 1945년 해방되면서 해남면이 해남읍으로 승격되고 1읍 13개면으로 또 개편되었다. 이후에도 약간의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옥천면 봉학리가 강진군 도암면으로 합병되고 군내 다른 면도 약간의 경계에 변화가 있었다.

인구 또한 1970년대는 24만 명이었으나 산업화의 현상으로 이농인구가 해마다 늘어 현재는 약 8만 명의 인구로 줄었다.

그러나 면적은 영산강 하구제방공사와 고천암 제방공사가 완성되어 농지가 많이 확장되어 전국에서 큰 군으로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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