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오후.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를 보았다. 그의 연주를 보면서 피아노의 선율이 흐른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가야금에 ‘농현(弄絃)’이 있다면 가히 ‘농반(弄盤)’의 경지랄까. 자유자재한 손놀림도 놀라웠거니와 피아노의 지배자다운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스물한 살 청년 조성진은 그렇게 지난달 20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폐막한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인상적인 연주를 해냈다. 콩쿠르 역사상 한국인 최초의 우승으로 세계 최고의 피아노 콩쿠르를 석권함으로써 피겨 스케이팅에서 김연아가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과 맞먹는 감동과 쾌거를 우리에게 안긴 것이다.

 

저급한 마음이 곧 지옥

 

요즘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신조어로 ‘헬조선’이란 것이 있다. 알다시피 ‘헬(hell,지옥)+조선’의 합성어로 ‘지옥과 같은 조선(대한민국)’이라는 거다. 버젓이 사이트까지 개설돼 있다. 아무리 냉소적인 신조어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이것은 좀 심했다.

얼마나 삶이 힘들고 지긋지긋했으면 이런 말까지 나왔을까 하는 안쓰러움도 없지는 않으나 희망을 갖고 도전정신으로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이런 비관적인 용어에 함몰돼 간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겠는가.

다행히도 ‘헬조선’이 여느 유행어처럼 일회적인 사회 풍자로 그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아예 빗대놓고 좌절을 부추기는 세력이 존재하는 한 쉽게 사그라질 기세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냉소적인 시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왔다.

6,7년 전쯤에는 ‘루저(loser)현상’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말 그대로 패배주의인데 속된 말로 상대를 ‘찌질이’로 폄하하거나 또는 자신을 빗대는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루저’가 비교적 개인간의 문제였다면 ‘헬조선’은 신성한 국가에 대한 모독일 수가 있다.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랄 내 나라를 지옥이라 말하는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사람들은 ‘잘살아보세’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민주화를 염원하던 지난 시절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지옥이라니.

이렇듯 염치는 간데없고 저급한 욕심으로 가득할 때 그 마음이 곧 지옥이다. 반대로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삶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얼마나 지혜롭게 헤쳐 나가느냐는 것은 곧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만으로도 벅찬 이 세상을 부정적이고 자기혐오에 빠져 비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헬조선’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자들이다. 암울했던 군사독재의 80년대. 민주화를 열망하며 저항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386세대’라는 운동권이 저항의 선봉에 섰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세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화를 달성한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동구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운동권은 오직 한 길을 고집한 면이 없지를 않다. 자기의 신념에 따라 변화를 선택한 사람을 가차 없이 변절자로 매도하고.

오로지 진보 좌파만이 영원할 것처럼 꿈쩍 않는 것이 그들의 현주소다. 칼 포퍼는 이런 말을 했다. “2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30대에 사회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는 머리가 없는 사회주의자들이 설쳐대는 꼴이나 다름없다.

물론 진보든 보수든 애국이라는 명분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일부 파렴치한 정치인들은 자기의 영달을 위해 선동적으로 ‘헬조선’을 부추긴다. 또 균형감각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사이비 언론마저 아무 거리낌 없이 ‘헬조선’에 동조를 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무리 ‘헬조선’을 떠들어대고, ‘흙수저’라 비하해도 조성진과 같은 아름다운 청춘도 있다.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주목 받는 유명인이 됐지만 그에게도 좌절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잘될 거라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자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계 로봇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데니스 홍은 이런 말을 했다. ‘항상 이길 수는 없지만 언제나 배울 수는 있다.(You can't always win, but you can always learn.)’ 혹자는 이들의 성취를 놓고 타고난 천재성과 배경을 이야기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우량한 유전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노력하는 천재적인 유전자가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청춘이 루저로 방황할 때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청춘을 도발했다. 아픈 것이 어디 청춘뿐이겠는가. 교묘한 말장난에 속지 말고. 무릇 중심을 바로잡고 살아볼 일이다.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