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시 ‘국화 옆에서’의 첫머리이다. 미당은 ‘시의 정부(政府)’라고 불릴 만큼 탁월한 시어로 많은 명시를 남긴 시인이다.

그러나 미당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2001년 한 문학지의 인터넷게시판에는 이 ‘국화 옆에서’가 친일시라는 글이 올라와 노난에 휩싸인 적이 있다. 시에 등장하는 노오란 국화(황국, 黃菊)와 거울, 누님과 같은 시어가 일왕의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거였다.

‘황국’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고사기(古事記)’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 출판사인 로베르 라퐁이 발간한 ‘상징사전’의 국화꽃에 대한 설명을 보면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엔 태양과 나침반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데, 그 중심에서 일왕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고 기술돼 있을 정도다.

‘누님’은 일왕가의 시조이자 태양신으로 추앙받는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천조대신, 天照大神)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미당의 일련의 미심쩍은 행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미당은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또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에 대한 헌시 등과 같은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으로 지탄을 받는 오점을 남겼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국화 옆에서’와 같은 대표작들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슬며시 사라져가고 있다. 미당이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을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이 학교 교장은 한영 스님이었다.

가출 청년이었던 미당은 그즈음 톨스토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농민적 무정부주의자였다.

이러한 톨스토이에 심취한 미당을 한영 스님은 ‘톨스토이 청년’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미당이 대원암 뒤꼍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 한영 스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러한 미당에게 한영 스님은 두보의 시집과 이백의 시집을 건넨다. “서정주 자넨 아무래도 중 되긴 틀린 사람 같고, 아마도 저기 저 하늘가를 훨훨 날아다니는 황새 같은 그런 시인이나 될 사람이야.”

그리고는 덧붙여 “그렇다고 황새처럼 구름처럼 두둥실 떠돌기만 해서는 시인이 되는 게 아닐세. ‘능엄경’도 읽고, ‘화엄경’도 읽고, ‘선문염송’도 배우고, ‘장자’도 보고, 제자백가도 접하고 이백도 만나고, 두보도 통달해야 시인다운 시인이 되는 게야. 자네 알겠는가?” “예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당은 시인이 되었다.

가을이 절정으로 달아오르면서 각지에서 국화축제와 전시회를 열고 있다. 해남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22일까지 군청 앞 광장에서 제 6회 국화향연을 열고 있다.

국화향연에는 지난해 10월부터 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재배한 1만2천600여점이 전시 중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국화 옆에서’만큼 국화를 노래한 절창이 어디 있겠는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시는 무릇 가슴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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